후기산업사회의 돌봄 공백은 청소년을 포함한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재편하고 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간식이 프로젝트의 중요 요소라는 뜻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돌봄이 주변적 요소로 생각되듯, 간식은 종종 그 중요성이 간과되었다. “오늘 첫끼예요.” 토요일 2시에 시작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이 간식을 집어 들며 하는 말이다. 4시에 모임을 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때로 첫끼는 편의점 햄버거와 캔에 든 밀크티 이기도 하다. 2017년 질병관리본부의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 4명 중 1명이 주 3회 이상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운다고 한다. 식생활 양식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신사회 위험인 돌봄 공백은 매우 일상적이다.

일상 생활의 배움과 돌봄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학교는 지식 전달을 중심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 (이는 교사의 돌봄 노동을 비가시화 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이고, 먹는 것은 어떻게든, 어디에서든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무한한 정보 접근이 가능한 시대, 오히려 지식과 기술은 어디에서든 습득 가능하다. 반면 돌봄은 어디에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사회변화 속 돌봄을 담당했던 사회 조직들은 녹아 사라지거나 고립되어 착취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일반적 지식 노동에 대한 요구가 감소하고, 돌봄 노동에 대한 필요가 높아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지식과 돌봄 중 돌봄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청소년들의 연구를 통해 다시 확인된다. 학교 외에 지식을 얻을 곳으로 인터넷과 오픈 소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일단 학원이 있다. 왜 계속 학원을 다니는지에 대한 연구에서, 학원의 인권 침해 사례와 불안을 자극하는 교육 방식에 대한 고발 사이로 청소년들이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청소년들은 학원을 억압적이고 도구적인 공간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친밀감과 유대감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친구들하고 학원 끝나고 간식 먹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학원이 하루 중 유일하게 어른들과 가깝게 대화할 수 있고, 친구들과 간식을 먹으러 다니며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곳이라고 청소년들은 말했다. 이는 돌봄과 친밀감에 대한 10대들의 강한 욕구를 역설한다.

간식은 친밀감의 매개인 한편 밥과 달리 부가적 요소로 여겨지는 만큼 돌봄 격차를 더 선명히 나타내 줄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밥까지는 무상급식 등으로 사회적 돌봄의 고려 대상이 되지만, 간식이라는 일상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는 쉽게 간과된다. 아동의 과일채소 섭취량과 결식에 대한 연구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차등적으로 제공되는 돌봄의 문제를 잘 드러낸다. 경제적으로 혜택받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간식은 고민거리다. “밥값까지는 어떻게 부모님한테 달라고 말했는데, 간식비까지는 좀 그렇죠… 마음 편히 간식 좀 먹고 싶어요.” 친구들이 간식 사먹으러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의 말을 생각해 내는 건 또 다른 고역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단순히 배를 곯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간식비는 사회적 교류의 핵심 비용이면서 밥을 건너 뛰었을 때의 안전망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말해졌듯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 만이 아니다.

그러나 종종 청소년의 식생활 양식의 변화와 사회적 돌봄의 필요성은 그들의 여성 가족 구성원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 돌봄의 중요성은 평소에는 간과되다가, 여성의 이중 노동을 강제하거나, 그들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엄마들이 애들보다도 일찍 집 떠나 일하러 가야하는데 누구보고 하라는 말이에요.” 간식을 집에서 챙길 수 있지 않냐는 우문에 대한 청소년들의 현답이다. 신자유주의는 지속적으로 돌봄을 폄하하는 한편, 여성들을 유연한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 간식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시민상이 필요하다. 기존의 시민은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활약하지만, 그가 의존했을 것이 분명한 돌봄 노동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여성학자 조안 트론토는 돌봄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거친 세상 속 유일한 안식처로서 집’이라는 신화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약적 노동과 자원이 필요한 돌봄을 사적 영역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평등하게 돌봄의 의무를 수행했을 때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배움과 성장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돌봄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돌봄은 낭만적이기 보다 뚜렷이 정치적인 행위로서, 현대 사회의 긴급 의제이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시민으로서 의무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동료들과 함께 무슨 제철과일을 살지 고민하고 있다.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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