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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원기 기자>

벚꽃이 만개한 봄날 섬진강 변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지난 4월 초에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섬진강 변을 생전 처음 걸어보고는, 그만 섬진강에 반해 버렸다. 한강과는 너무나 다르게 생긴, 순하게 흐르는 강물과 깨끗한 모래톱은 꿈에서나 본 것 같은 정겨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생각해 보면 섬진강만이 아니다. 내가 일하고 생활하는 이곳엔 그런 자연이 참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이렇게 좋은 환경을 맘껏 향유할 때마다 이런 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특히 한창 일할 나이에 퇴직한 사람들, 혹은 공기 나쁜 서울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노인들을 생각해 본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서울에서 만났던 퇴직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경제적 이유였다. 서울에도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인데 지방은 더 하다. 거기 가서 뭘 하며 먹고살겠느냐, 아이들 학비며 결혼자금은 어떻게 마련하느냐, 두 집 살림하면 돈이 더 든다... 등등. 열악한 지방의 현실, 특히 열심히 일해 봤자 손해나 보며 아직도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젊은이는 찾아볼 수 없고 노인들만 남아 있는 오늘의 농촌의 현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적이다.

그러나 퇴직 전에 행정관리직에 종사했던 59세의 Y씨의 의견은 좀 달랐다.

“6시 내고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농촌에도 분명히 할 일이 있고 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문제는 과연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랄까 결단력이랄까 그런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겠지요.”

그는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일하고 싶다면) 그동안 하던 일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사무실에서 하얀 와이셔츠 입고 편하게 일하던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식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야지요”

62살의 S씨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제 주변에도 50대 퇴직자가 많습니다. 그런 후배들을 볼 때 저는 자녀의 나이에 따라 다른 충고를 해주지요. 만일 아이들이 중고생이라면 무조건 가족과 함께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대학에 다닐 정도라면 어디든 가서 농사라도 짓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나이 들면 도시를 떠나 고향 마을이나 혹은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사람을 심심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이다. 여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도시에서, 특히 수도권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58세의 I씨는 말한다. “아유, 문화생활도 못하고…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요. 친구들도 없고, 그렇다고 외국처럼 복지가 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그런 데서 살면 금방 우울증에 걸릴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영감님이 텃밭이나 가꾸며 자그만 봉사나 하면서 살면 어떠냐고 하기에 그러려면 혼자 가시라, 나는 여기서 살겠다고 했어요.”

전업주부의 경우에도 남편이 직장 일로 지방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아이들 교육 등의 이유로 아이들과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화된 요즘의 추세를 감안한다면, 퇴직한 후에 돈도 들어오지 않는 텃밭 가꾸기나 봉사활동을 위해 지방까지 가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경계를 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경계를 넘는 삶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 혹은 수도권이라는 경계를 벗어나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낯선 곳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젊어도 노인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또한 중심의 정체와 허구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인이나 ‘타자’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지적이 아니다. 지방에서 살아봐야 서울에서의 삶이 얼마나 문제가 있고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수 있다, 자연 속에서야 비로소 문명이라는 것의 약점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도 퇴직 후에 거주지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퇴직 후에 일종의 이동주택인 캐러번을 타고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사는 선진국의 노인들처럼은 아니더라도, 퇴직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살며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활력과 긴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 지방의 여건은 미흡하다. I씨의 지적처럼 지방의 사회복지나 문화적 여건이 서울보다 더 열악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할 일도 있다. 당신이 지방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다면, 고향 마을의 복지 수준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조금의 보탬이라도 된다면 당신의 노후는 훨씬 더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것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울 걱정은 하지 마시라. 당신의 부재는 서울의 교통문제와 주택문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자녀들 문제 또한 마찬가지. 같은 서울에 살아봤자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서울살이와 ‘1일 생활권’의 복잡한 교통 때문에 한 번 오기도 쉽지 않은 자식들을 기다리다 화만 낼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활기차게 노후를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니겠는가. 손자녀들에게 고향의 순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서 그대, 고향으로 돌아오시라.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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