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아니라 저출생입니다
저출산 아니라 저출생입니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9.07.18 15:31
  • 수정 2019-07-18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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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용어, 정책에 사용
미혼→비혼, 버진로드→웨딩로드
유모차→유아차, 몰카→불법촬영
2016년 ‘가임기 지도’ 논란 이후
여성들 다양한 대안 제시
서울시 시작, 여가부·문체부 동참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일 ‘저출생의 가장 큰 원인은 일자리와 교육비’라는 주제로 보도자료를 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 31만여건에서 ‘저출생 고령화’를 분석한 빅데이터 결과였다. 문광부가 ‘저출산’(低出産·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 대신 ‘저출생’(低出生·아기가 적게 태어난다는 뜻)이란 표현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광부 뉴미디어소통과 담당자는 “내부에서 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돌릴 소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 저출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서 “다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여러 차례 자문회의를 거친 결과 저출산을 쓰기로 했다고 전해와 공식적으로는 저출산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공식 정책용어는 아니라고 한 발 뺐지만 정부 부처가 저출산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을 반영해 바꾸려고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정부가 공식 자료에서 쓰는 용어를 바꾸고 있다. 여성들이 제안한 용어가 정책 용어로 들어오면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문체부보다 앞서 성평등 용어를 정책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기관은 서울시다. 지난해 박원순 서울시장은 취임사에서 “(보육의 문제는) 여성 경력 단절, 그리고 저출생 문제 등과 직결돼 있다”며 성차별적 요소가 담긴 용어를 ‘성평등 용어’로 바꿔쓰겠다고 선언했다. 곧 이어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시민 공모를 통해 ‘성평등 언어 사전’을 발표했다. △여성의 직업 앞에 ‘여’ 붙이지 않기 △‘그녀’ 대신 ‘그’로 표현하기 △‘처녀’ 대신 ‘첫’ 쓰기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기 △‘미혼’(未婚·아직 결혼하지 않음)을 ‘비혼’(非婚·결혼하지 않은 상태)으로 바꾸기 △‘자궁’(子宮) 대신 ‘포궁’(胞宮·세포를 품은 집)’으로 바꾸기 등을 제시했다. 재단은 올해 양성평등주간(7월 1~7일)에도 ‘부녀자’를 ‘여성’으로, ‘김여사’를 ‘운전 미숙자’로, ‘수유실’은 ‘아기 쉼터’, ‘낙태’ 대신 ‘임신중단’, 결혼식장의 ‘버진로드’도 ‘웨딩로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강경희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는 “누군가가 성차별적이라고 느끼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들을 시민과 함께 논의하고 바꿔나가는 과정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쓰던 성차별적 단어와 행동들을 돌아보고 기존의 논의를 확장하며, 우리 안의 성평등 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육아는 엄마 몫’이라는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조하거나 ‘여교수’처럼 유독 여성 앞에만 접두어 ‘여’를 붙이는 성차별 언어를 대체하는 ‘성평등 언어’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특정 성·연령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수 있는 용어를 바꾸자는 제안은 정치권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은 지난 4월 법률에서 쓰이고 있는 ‘미혼’을 ‘비혼’으로 개정하는 내용의 ‘건강가정기본법’ 등 4건, ‘유모차’를 ‘유아차’로 개정하는 내용의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1건 등 총 5건을 법률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황 의원은 “변화한 시대상황과 국민정서를 법률에 명확히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보다 앞서 2017년 12월 김해영 민주당 의원이 처음으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고, 김종훈 민중당 의원도 지난해 8월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법’ 개정안 등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 발의는 활발하지만 법안 통과는 요원하고, 여전히 국회 내에선 저출생 보다는 저출산이, 비혼보다는 미혼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현실이다.

성차별 언어를 성평등 용어로 대체하자는 목소리는 20여년 전부터 있어 왔다. 성차별 언어는 구성원들이 또 다른 구성원을 비하하거나 자신을 부족한 인간으로 내면화하게 만든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성학자들은 언어에도 성인지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고 요구해왔고,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대체어를 개발·제시해왔다. 여성가족부도 이미 지난 2006년 성평등 용어 개발에 착수했었다. 문제는 이렇게 탄생한 언어가 일상에 뿌리내리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성차별 언어 문제를 알리고 이를 대체할 성평등 언어를 확산시킨 데는 온라인 여성 시민들의 힘이 컸다. 본격적인 변화의 물꼬를 튼 건 2016년 12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캠페인였다. 당시 행정안전부가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하자, 저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여성을 출산도구화하는 것이냐는 공분이 일면서 SNS에선 “#저출산_대신_저출생_쓰자”는 해시태그가 퍼졌다. 이보다 앞서 반성폭력단체들은 헤어진 연인에게 앙심을 품고 유포한 성적인 영상을 가리키는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를 대체할 용어로 ‘불법 촬영물’을 제시했고 불법 촬영물 사이트인 ‘소라넷’ 폐쇄에 앞장선 반성폭력단체 ‘DSO’는 불법 촬영물을 촬영하고 유포하는 행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청하고 공유하는 행위도 ‘디지털 성폭력’이라고 명명하며 용어 사용을 확산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제는 정부도 공식적으로 디지털 성폭력을 사용하고 경찰도 ‘몰래카메라’ 대신 ‘불법 촬영’이라고 표현한다.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은 “시민들이 지금 사용하는 용어가 불편하다고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고 대체 용어들을 직접 제안했다는 점, 여기에 동의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언어는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면서 “대중이 사용해야 생명력을 갖는 언어는 권위있는 누군가가 쓰라고 지시한다고 대중들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만큼 지금의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정 소장은 언어를 파도에 비유해 “지금은 밀물”이라며 “정부가 앞장서 언어를 바꾸려하기 보다는 시민들의 추세를 반영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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