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으로 아이들 사랑하는 법 아세요?”
3km 걷기코스 도전한 어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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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저녁. 촉촉히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남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가. 지난 4월 19일은 어른·아이 합쳐 모두 열다섯 명이 흔치 않은 그 경험을 함께 나눈 날이었다. 여성마라톤대회가 그회를 만들었다.

여성마라톤대회에 서울 미아초등학교에서 일하는 심재선씨를 포함한 11명이 단체로 3km 걷기 코스를 신청했다. 이 팀을 저녁 7시경 남산식물원에서 만나기로 한 4월 19일,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요?” 기자의 질문에 “아이들이 남산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거든요. 비 좀 오면 어때요”하는 심재선씨의 말을 믿고 남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시간이 지날수록 빗줄기는 더 굵어지기만 했다.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과연 몇 명이나 이 비를 감당하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을지.

좋은 추억거리로 만들래요

저녁 7시 반쯤 됐을까. 식물원 쪽으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족히 십수 명은 돼 보이는 아줌마·아이들 무리가 식물원 곁 호수 근처로 몰려왔다. 우산까지 들고 있어서 갑자기 식물원 근처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우리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어사모) 회원들이에요.” 우렁찬 목소리에 빗소리도 잠시 멈췄다. 그 자리에 온 사람은 심재선씨를 비롯한 어른 6명과 초등학생 8명으로 모두 14명.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던 식물원 앞 연못 근처는 이들의 등장으로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일단 만나긴 했으나 과연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사모 회원들은 식물원 근처에 있는 한 건물 밑으로 얼른 향했다. 뛰어난 안목이었다.

비를 피하면서 돗자리도 깔 수 있는 나름대로 아늑한(?) 곳이었으니. 빗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이는 가운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들이를 위해 준비된 김밥·떡·과일을 먹으면서.

어사모는 미아초등학교에 자녀를 둔 어머니와 그 아이들로 꾸려진 모임. 4년 전 1학년 같은 반에 자녀를 둔 6명의 어머니들이 우연히 뜻이 맞아 만들어진,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섞여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는 작은 모임이다. 어사모가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데는 심재선(38)씨의 역할이 컸다. 심씨는 지난해 ‘제2회 아줌마마라톤대회’에 자원봉사로 참가한 경력의 소유자.

“작년에 자원봉사로 참가했어요. 직접 뛰지는 못했지만 그 시간이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어사모 회원들이 그 때 왜 혼자만 참가했냐는 구박도 많이 했구요.” 이런 과정을 통해 어사모 회원들은 단체로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아이들하고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너무 좋아요.” 이미경(36)씨는 아이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면서도 아이들과 공식으로 함께 할 시간이 또 생겨 너무 좋단다. 단, 남편들은 아직 이 모임 회원이 아니기에 대회 참가는 내년이나 돼야 가능할 것 같다고.

“엄마랑 같이 걷는 게 좋아요.” 열한 살 된 아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이다. 아무래도 아직은 그냥 친구·엄마와 함께 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하는 분위기. 평화를 기원하는 여성마라톤대회의 주제까지 파악하기에는 아직 어린 탓인가 보다.

지난해에 자원봉사로 심재선씨와 참가했던 조영빈(13) 학생은 “가족들이 힘을 모아 함께 뛰고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이번에는 자원봉사가 아니라 직접 마라톤대회에서 걸을 수 있어 기대가 크다”고 말해 그나마 나이값(?)을 했다.

걸으며, 즐기며… 일석이조!

엄마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 기회를 통해 아이들에게 걷는 습관을 갖게 할 생각이에요.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게 하려는 생각이죠. 평소에 아이·어른 모두 걷는 거 잘 안 하잖아요. 엄마랑 같이 걷다보면 절로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어사모 맏언니 뻘인 조민정(42)씨는 이 대회를 아이들 건강을 챙기는 출발지점으로 만들 욕심이다. 다른 엄마들도 비슷하다. 함께 노는 시간이라는 빌미(?)로 아이들에게 다부진 훈련을 시킬 각오들이 대단한 것.

“아이들이 인내심을 기를 수 있을 거 같아요. 3km지만 끝까지 걷자면 힘이 들겠죠. 사람들과 함께 조금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인내심을 기를 수 있다고 믿어요.” 우경숙(36)씨의 속내를 아이들은 알까?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여성마라톤대회가 매력적이죠. 함께 즐기면서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5월달, 아니 올해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이영란(38)씨의 기대는 아이들 못지 않다. “좋은 기회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어요.” 전성미(42)씨도 비슷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특히 작년에도 참가했던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기쁨이 두 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뛰는 코스를 하고 싶지만 일단 아이들과 함께 하자니 3km에 만족해야 할 거 같아요.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이번 대회를 잘 마무리할 겁니다.” 5월 11일, 어사모 회원들의 다정하면서도 결연하게 걷고 있을 모습이 절로 상상되는 심재선(38)씨의 다부진 각오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빗줄기는 더 세지고 바람도 매서워졌다. 거기다 건물을 지키는 아저씨의 “여기선 시끄럽게 하면 안돼요!”하는 말까지 듣기도. 어사모 회원들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맘은 굴뚝같았지만 추워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그만 자리를 뜨기로 했다.

“비오는 날, 그것도 남산에서 인터뷰를 다하고. 아이들과 우리 모두에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어머니들의 한결같은 인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잘 모른다. 그 날 건물 처마 밑에서 먹었던 김밥과 보온병에서 막 흘러나온 따뜻한 커피의 맛을 기자 역시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걸. 비오는 남산식물원의 고요하고도 촉촉한 풍경까지도.

혜원 기자nanca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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