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현/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대학 내 성폭력은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대다수의 대학 내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구성한 상황으로만 이루어진다. 즉 제3자인 목격자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며 가해의 흔적과 같은 물증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진실은 오직 가해자의 설명과 피해자의 설명 중 하나에 있다. 물증이 사건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아닌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 여부로 사건의 진위를 판단하려 한다면 성폭력의 사실을 입증해야 할 부담은 완전히 피해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성폭력 사건이 다른 사건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불공정한 게임이 되는 이유이다.

둘째, 대학 내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개인A와 개인B가 아닌 교수A와 (여)제자B라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상징적 권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기관이다. 그것은 대학이 지식생산의 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학을 통해 형성된 동창, 선후배, 사제 관계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문화에서 교수와 제자의 관계는 단지 학점을 주고받는 관계 이상의 권위와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이 관계는 졸업 후에도 지속된다. 이 구조에서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는 서구대학과 달리 한국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에 따라 지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자일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아버지나 목사님한테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충격이 컸”다고 표현하는 성폭력 피해자 여학생들의 증언에서 우리는 교수에 대한 이 같은 기대를 확인한다.

사제관계에서 물증 없이 발생하는 성폭력은 그 위에 성폭력 피해자 여성을 오히려 백안시하는 한국의 이중적 성문화까지 가미되면서 없었던 사실로 마감되기가 십상이다. 교수를 대상으로 발설해서 자신이 보호를 받고 상대방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대학 내에서 용기있는 극소수의 여학생들이 어렵게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들은 여성운동단체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외부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들을 지원해주는 여성운동단체가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교수들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되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의 경우, 대구여성의 전화 전 공동대표 2인이 성폭력 가해자인 K(당시 경산 K대학교 교수)와 L(당시 대구 K대학교 교수)에 의해 사이버명예훼손죄로 고소되어 2002년 10월의 원심과 2003년 4월의 항소심에서 각각 200만원과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K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고 L은 학교에서 해임당한 상태이지만 기소 전에 ‘피해자의 일방적 진술만을 기초하여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게재’한 점을 문제삼은 것이다. 역고소 대책위는 이후 ‘공공의 이익’의 개념으로 이 문제에 대처했지만 대구의 재판부는 여성운동단체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가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가 어렵고 또 할 수 있는 창구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운동단체의 활동에 명예훼손죄를 적용하는 것은 대학 내 성폭력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가해자의 명예훼손만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처사이다. 대학 내 성폭력을 보는 방식은 물증 여부가 아닌, 정황증거로 가해자의 설명과 피해자의 설명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성폭력은 법 이전에 인권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우리 사회의 법적 정의가 인권을 보장해주지 못할 때 그 법적 해석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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