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식 이뤄진 태화관 터에
성신여대 전신 태화여학교 세워져

1926년 태화여자관 성경학교 교감 이효덕
1926년 태화여자관 성경학교 교감 이효덕

여성독립운동가 재발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지만 올 3·1운동 100주년에도 여성을 조명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한국여성사연구의 태두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가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서방국가의 경우와는 달리 주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추진과정 속에서 발전했다”며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 한국 여성운동의 초석이 3·1운동”이라는 연구를 내놓은 지 오래지만 3.1운동에 대한 여성사적 해석은 여전히 빈곤하다. 3·1운동은 신교육을 받은 여학생으로 대표되는 한국여성이 정치적 주체로서 역사의 전면에 최초로 등장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서구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여성들도 참정권을 위해 피의 대가를 치렀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우리사회에 여권이 뿌리내리는 토양이 됐다. 3·1운동을 계기로 설립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여성들이 만세시위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며 ‘대한독립을 위한 첫 피는 대한여자에게서 흘렀다’는 기사를 싣는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남녀평등 원칙을 명시하고 건국강령에서 여성 참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임시정부 계승을 천명한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 수립과 함께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선거권을 부여한다.

여학생들의 적극적 참여가 이뤄진 3·1운동을 경험하며 보통여성들도 주체적으로 교육받기를 갈망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태화여학교 등이 탄생한다. 3·1독립선언식이 이뤄진 태화관을 남감리회여선교부가 매입해 그 장소성을 이어받은 태화여자관을 세우고, 한국여성들의 적극적 요구에 의해 계획에 없던 여학교까지 설립하게 된다. 3·1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던 신여성들의 직업터전이 되기도 한다.

1926년 태화여자관성경학교(협성여자성경학원) 교감 이효덕(1895~1978)을 찍은 사진에 배경으로 나온 태화관 내 ‘별유천지’가 3·1운동의 적확한 발상지다. 이 사진이 민족성지의 원형을 담은 현존 유일 영상자료라는 것도 굉장히 상징적이다. 3·1운동으로 6개월의 옥고를 겪은 이효덕은 출옥 후 서울여자협성신학교에 입학, 재학 중인 1921년 3·1운동 2주년 기념시위를 주동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김마리아, 나혜석 등과 함께 3·1운동으로 이어지는 2·8독립선언에 앞장 선 일본 유학생 황에스터(1892~1971)는 출옥 후 태화여자관에서 공장부인들을 위한 무료야학강습을 하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앞장섰다. 역시 2·8독립선언 가담자인 유영준(1892~?)도 1927년 태화진찰소 의사로 일하며 교편도 잡았다. 3·1운동에 참여한 간호사 한신광(1902~?)도 이곳에서 국내 모자보건사업을 첫 발걸음을 떼었다. 이들의 제자인 태화여학교 생도들은 1930년 서울여학생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후 태화여학교는 1936년 성신여학교로 인계돼, 성신여대로 대표되는 여성교육의 요람 성신학원으로 오늘까지 이어진다.

현재 인사동 태화관이 있던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들어섰고 서울시 등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빌딩 앞 공영주차장에 3·1독립선언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올 8·15 광복절에 개장을 앞둔 이 광장에 조선총독부 건물의 돌기둥으로 식민지역사의 상처를 표상하겠다는 의도로 ‘돌의 귀환’이라는 행사를 벌였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겠다는 의도로 안양의 이은숙 선생(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내) 옛 집터에서 이 행사의 일부를 치르기도 했다. 정작 3·1정신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은 태화관 터에서 독립운동과 함께한 한국여권운동이 꽃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위상을 제고하겠다는 정부와 지자체의 발표가 충분한 연구조사 없이 피상적으로 이뤄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더 늦기 전에 ‘3·1독립선언광장’에 태화관이 어떻게 한국여성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 장소가 됐는지를 기록하고 기릴 것을 제안한다.

『3·1정신과 여성교육100년』
『3·1정신과 여성교육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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