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으로 이뤘다고?
노력 성향도 출생순서 영향
'성취'가 다른 사람을
숭배·모욕할 근거여선 안돼

대학의 ‘과잠’(학과 이름이 새겨진 점퍼의 줄임말) 입기 문화가 고등학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서 라기엔 현상은 선택적으로 나타났다. 유독 과학고, 외고 등 특목고와 유명 고등학교들이 학교 이름이(주로 영어로) 새겨진 옷을 입는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과잠을 입고 소개팅에서 학생증을 내 놓을까? 

사실 이 글은 왜 그러는가가 궁금해서 쓴 건 아니다. 그보다는, 높은 성취는 다른 이들보다 더 노력했고, 더 능력있다는 뜻이므로 더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지 못했으면 어떤 결과든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성취가 본인 노력으로 공정한 시험을 통과한 결과라는 믿음이 허구임을 도덕철학부터 경제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말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은 노력이 도덕윤리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노력을 가능하게 한 사회경제적 조건만 문제는 아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심지어 노력하는 성향 조차 출생순서와 같은 임의의 기준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버드에 합격한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피력하는 학생들에게 샌델이 첫째로 태어났다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매년 그 중 75~80%가 손을 들었다고 한다.

물론 첫째로 태어난 것이 성취를 이뤄낸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노력으로 성취했다는 주장의 허술함은 여전하다. 특히 한국사회와 같이 사회안전망이 충분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쉽게 노력이 가능한 조건을 잃을 수 있다. 주양육자의 질병, 주부양자의 실직, 소수자로서 받는 차별과 폭력 등은 선택과 노력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성적이 높은 사람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참 애썼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결과가 잘 나온 것이 반드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노력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상관과 인과를 혼동하는 사고의 오류다. 노력의 존재는 흥미롭다. 노력이 성과를 만든다기 보다는 성과가 노력의 존재를 증명한다. 성과를 내지 못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 그건 아둔함이 된다.

한국사회는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에 비해, 그 후의 삶은 그것이 낙오이건 특혜이건 받아 삼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 관심은 성과가 실력에 의한 것인지, 다른 것에 의한 것인지가 아니다. 성과가 났냐, 나지 않았냐라는 결과이다. 여기서 노력은 애쓰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과를 내지 못할 조건에 처한 사람들은 삶의 격차를 받아들이며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겸연쩍어 해야 한다. “내가 노력 안한 건 사실이니까요.” 청소년들은 인간답게 밥을 먹고 잠을 잔 것에 대해 자신을 자책한다. 아픈데도 참고 공부하는 친구를 부러워한다. 충분히 착취하지 않은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전 밥 먹는 친구들이 부럽죠, 전 밥 먹을 시간도 아까워서 공부하는 데 이게 그 전날의 공부가 완전히 안됐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거든요.” 청소년 연구자들은 현장 조사를 통해 동료 청소년들이 입시의 문제를 지적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착취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절대 손해봐서는 안되는, 손톱 만큼의 기회도 놓쳐서는 안되는 가성비 사회에서 최선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반드시, 무엇이든 하는 ‘도덕’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은 낙오를 당해도, 차별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성취가 다른 차별의 기준과 마찬가지로 임의적인 것은 말해 지지 않는다. 그건 현실이고 당연한 것이 된다. 그게 나 자신이어도 비정함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1%가 아닌, 또는 0.01%가 아닌 자기 자신은 어떤 의미일까? 다른 사회 구성원들은 어떤 존재일까?

청소년 연구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키워드로 ‘요구한 것보다 항상 못하는’, ‘자기 자신이 싫은’을 뽑고, 타인에 대해서는 ‘나보다 위 또는 아래’, ‘잘되면 안되는’, ‘같이 살 수 없는’, ‘친구가 될 수 없는’을 뽑았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즐겁지 않은’, ‘아플 때 병원 못가는’, ‘자기를 돌보지 않는’, ‘고민할 필요 없는’이 키워드로 나타났다. 청소년 우울증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보다 또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하여 다다른 성과는 값지다. 그 반짝임은 누군가의 삶에서 소중한 자원일 수 있다. 하지만 성취가 한 사람의 됨됨이와 지적능력을 판단하는 총체적 기준이 되고, 타인을 숭배하거나 모욕하는 근거로 확장 될 때, 나아가 미래 세대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고 낙오를 당연시 하는 규범이 될 때, 더 이상 그 반짝거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그러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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