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산파와 여성 버스정비공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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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파리 13구 구청에서 열린 공청회.

저녁 6시 30분. 소리 없이 봄비가 내리고 있다. 파리에서 중국사람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 13구 구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앙 홀에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남성, 여성, 노인, 젊은이 등 다양한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이 말을 씁니다만 지금까지 ‘남성의 직업’으로 여겨졌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저희 13구의 여성 13명을 선별했습니다. 이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구별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거지요.” 13구 구청장 세르즈 블리스코(Serge Blisko)가 여성들에 둘러 싸여 마이크를 들고 인사말을 하고 있다.

3월 8월,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13구에서는 이 행사를 기획했다. 소방서원, 보안경찰, 지하철역장, 제빵기술자, FM음악방송 대표, 건축학교 학생, 버스 정비공, 직업교육학교 교장, 식당주인, 앰뷸런스 요원, 응급출동경찰, 정원사 이렇게 12명의 여성들에다가 산파를 하는 남성 한 사람을 덧붙여 13명의 큰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구청 중앙홀에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남성도 여성의 직업으로 여겨지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조산원 일을 하는 남성 한 사람이 포함된 것이다.

프랑스 역사에도 여성이 없네

이날 행사에는 시장, 여성의 권리 담당 여성 부시장과 13명의 주인공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과 여성단체 회원들 이렇게 약 50여 명이 모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프랑스 여성사의 권위자인 미셸 뻬로 교수가 자리를 함께 한 사실이다.

뻬로 교수는 우리나라에도 조르쥬 뒤비와 함께 편집한 <여성의 역사>가 번역되면서 여성학도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다. 뻬로 교수는 처음부터 일반 시민들 사이에 서서 전시회 개막식 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어진 13명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사회는 나딸리 필(Nathalalie Pilhes) 여성 부시장이 맡았다. 토론과 대화가 열리는 2층 ‘축제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뻬로 교수가 쓴 <옛적에… 여성의 역사가 있었네>라는 책의 중요 주제를 삽화와 함께 발췌 확대해 전시하고 있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남녀평등 의식을 고취시키고 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게 자신감을 불러넣어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 역사 교과서 속에 여성의 이름은 쟌 다르크와 마리 퀴리 정도가 나올 뿐입니다. 내년이 조르쥬 상드 탄생 200주년입니다만 지난해 있었던 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과 달리 큰 행사가 기획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셸 뻬로 교수의 설명이다.

7시 30분. 13명의 주인공들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먼저 뻬로 교수는 남성들의 직업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특별히 어려운 점이 없는가를 물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큰 차별을 받고 있지 않지만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남성들로부터 과연 여성의 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경찰이나 소방서원 등의 경우가 그랬는데 현장에서 남성들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을 입증한 이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1970년대 초 여성운동의 물결이 시작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 남성들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와서 드러내놓고 남녀차별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뻬로 교수는 20년 전만 해도 여성들이 그런 직업을 갖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오늘날 프랑스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렇지만…”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지만 여성들은 계속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율적인 선택의 자유와 남녀평등을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주요한 법제도 상의 개선은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아직까지 많은 불평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론상의 남녀평등을 생활 속의 평등으로 바꾸는 일에 앞으로도 많은 힘을 쏟아야 합니다.”

마리 레니에(Marie Reynier) 직업교육학교 교장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정책 방향이 설정된 이후 여성들이 에너지 절약이나 위험관리의 영역에서 일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의 기업 조직도 수직적 피라미드 조직에서 조직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수평적 조직으로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직업 세계에서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기회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쥬 팜므’는 현명한 여성? 남성?

남성들이 명령-실시 방식의 일 처리에 익숙하다면 여성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수평적인 협력체계를 구성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요구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서로 서로의 기대를 조정하며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여성들의 일 처리 방식이 이제 점점 기업 조직 내에서 여성들의 상대적 강점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남성들도 인생의 모든 것이 회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직장과 가족 사이에 균형 잡힌 생활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뻬로 교수는 유치원 교실에서부터 여자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겨 행동을 제약하고 남자아이들은 마음껏 뛰놀게 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여성을 영원한 아이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여학생들을 위해 좀 더 공격적인 교육방법이 필요합니다.” 뻬로 교수의 말에 이어 청중 가운데 머리가 흰 백발의 할머니가 손을 들고 말한다. “나는 어려서 목수가 되고 싶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직업학교에서 거부당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남자아이, 여자아이라고 구분하는 말부터 없애고 그냥 다 똑같이 아이들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청중 가운데 남성 한 사람이 용감하게 손을 든다. “여성들이 일과 출산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여성들이 직업 생활을 한다고 아이를 낳지 않거나 겨우 한 명밖에 낳지 않으면 앞으로 프랑스라는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셸 뻬로 교수가 여기에 답을 한다.

“프랑스가 유럽연합 가운데 여성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두 번째로 높습니다. 그런데 출산율은 제일 높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프랑스 사람들만 사는 닫힌 나라 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구는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미래는 여러 인종이 모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열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산파 일을 하는 40대 남성 빌리 벨하센(Willy Belhassen)은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생명체를 가까이에서 맞이하고 기다리는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생명 탄생의 신비를 경험하고 싶어서 산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가사 분담도 철저하게 하는 편이라면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보기 이전에 먼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는 남성 친구들 앞에서도 “그래, 나는 페미니스트다. 어쩔래?”라고 말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로 프랑스에서 산파를 ‘사쥬 팜므’(sage femme)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현명한 여자’라는 뜻이다.

장미란 / 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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