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소수자로서
이 사회의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리트머스와 같다”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정든 선생님은 잘라라. 듣기만 해도 손끝이 차가워지는 말이다. 예서가 한 말이 아니다. 10대의 문화와 생활양식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던 청소년 연구자가 한 말이다. 픽션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스카이캐슬’의 김주영 선생님이 예서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예서가 애처롭게 선생님만이 자길 이해한다며 정을 붙였을 때, 이 코디네이션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연구자가 설명을 덧붙여줬다. “아, 제 과외쌤이 5년 됐는데, 정든 쌤은 있다보면, 계속 얘기하게 되고, 잡담만 하니까. 성적도 안 오르니까. 애들이 정든 쌤은 자르라고 하거든요.” 스카이캐슬에 사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치열한 특목고에 다니는 것도 아닌, 수도권 일반 공립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의 관찰이다. 관계는 성과에 방해가 된다. 서로 모르는 사이일 때 최대의 효율이 난다. 일상의 세세한 단면까지 성과의 기준이 침투한다. 그리고 청소년들도 충분히 이 사회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다.

예외적인 극단적 사례라고 쉽게 안심하고 싶을 수도 있다. 또는 ‘역시 요즘 애들 무서워’ 라는 말로 그들을 타자화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소수자로서 이 사회의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리트머스와 같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관계의 파국을 가르쳐왔다. 일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잠을 줄이고 간편식을 먹는 것처럼, 일의 결과, 공부의 결과가 중요하지 한 사람이 먹고, 자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라고 말해왔다.

관계는 우리의 위치와 권력,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짓는다. 그것이 반드시 타고 태어난 관계일 필요는 없다. 관계는 큰 이야기의 흐름에서 우리가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는지 알게 한다. 인간은 애착하는 동물, 정주며 정들고 싶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물학적, 사회적 필요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관계의 가치는 종종 성과와 연결지어진다.

인생에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기준이 단편적이고, 특히 성적, 성과와 같이 순위로 매기기 쉽고,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는 기준 일 때 문제이다. 많은 연구들은 인간은 불안과 공포를 느낄 때, 유연하게 사고할 수 없고, 배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세계는 넓어질 가능성을 잃는다.

사회는 구석구석 파괴되었다. 그러나 청소년과 일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별과제가 살의를 불러 일으킨다지만, 놀랍게도 청소년 연구팀 사이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일까. 왜 이들은 악몽의 팀 프로젝트를 “내가 하면 되지요 뭐” 라고 이렇게 쉽게 웃으면서 환대로 넘길까. 이들의 말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힌트는 “생기(이 곳에서의 내 별명이다)는 생기부를 쥐고 있지 않잖아요” 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열정적으로 어떤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히 즐겁다. 그러나 도시에 돈 없이 놀 수 있는 곳이 사라졌듯이, 청소년에게 대가없이 관계 맺을 수 있는 곳도 거의 사라졌다. 교실에서의 협력에는 늘 상 또는 벌이 따라온다. 학점이라는 결과 또는 처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관계를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의 삶에 개발제한 구역이 있어야한다. 특정 성과와 보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빈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연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린벨트로 보호해야 나중에 노다지를 캘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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