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속으로] 일순간에 까발려진 위선과 가식
[공연 속으로] 일순간에 까발려진 위선과 가식
  • 강일중
  • 승인 2019.02.25 16:50
  • 수정 2019-02-25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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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미나 레자 작/김태훈 연출의 연극 ‘대학살의 신’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뻔뻔하고 야비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 연출 김태훈)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돌변할 수 있는 인간의 선하고 악한 본성을 네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명이 들어오고 극이 시작되면서 관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한 중산층 가정의 거실이다. 튤립이 화병에 소담하게 꽂혀있고, 집주인의 예술 취향을 드러내는 듯 이곳저곳에 미술 관련 서적이나 패널, 장식 등이 보인다. 안정감과 차분함이 느껴지는 무대다.

등장인물은 서로 초면인 두 쌍의 부부. 11살 난 두 초등학생 사이의 싸움 과정에서 한 아이가 상대방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치아가 부러진 일이 발생하자 이 사안을 원만히 해결하려 피해 아동 집에 모인 양측 학부모들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만나긴 했지만 네 사람 사이의 초반 대화는 아주 부드럽다. 예의와 교양이 철철 넘치고, 상대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단어의 선택도 신중하다. 아이들 간의 싸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한쪽의 주장이 귀에 거슬리면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하고, 다른 편은 합리적인 태도로 기꺼이 수용하는 모습이다. 화기애애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초반 기류는 양측 부모들의 자기 자식 보호 본능이 발동되면서 서서히 말꼬리를 잡아 물고 뜯는 분위기로 바뀐다. 급기야 언어를 통한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한 것은 일순간. 이 와중에 이들 중산층 부부의 위선과 가식은 한꺼번에 까발려지며, 속물근성은 백일하에 드러난다.

작품의 묘미는 대립 구도가 두 쌍 부부 사이의 ‘어른 싸움’에 국한되지 않고 당사자들이 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엉뚱한 곳으로 불꽃이 튀었다는 데 있다. 가해 어린이와 피해 아동 학부모들 사이의 충돌은 단지 기폭제일 뿐이다. 등장인물 사이의 갈등은 남자 대 여자, 남자 대 남자, 여자 대 여자의 언어 난타전으로 어지럽게 바뀐다. 각자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공격의 대상을 일순간에 바꿔버리는 것이다. 느닷없이 ‘한심하기 그지없는 남자들!’, 혹은 ‘속 좁은 여자들!’에 대한 공격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아내가 남편을 비난하다가 여자 또는 남자끼리 연대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객석의 웃음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다.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이 작품을 쓴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는 ‘아트(Art)’로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 극작가다. 흰색 바탕에 흰 선이 그려진 고가의 그림을 둘러싸고 3명의 남자 친구들이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시기하고 질투하고 토라지는 모습을 통해 속 좁은 남자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연극이다.

‘아트’는 그러나 친구들 사이의 금 간 우정이 회복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따뜻함을 안겨주고 여운을 남긴다.

‘대학살의 신’ 역시 비슷한 결말이다. 네 사람 사이의 무차별적 비방전이 진정된 후, 결국 피해 아이의 아빠 미셸과 가해 어린이의 엄마 아네뜨가 그간의 황당한 상황 전개에 대해 후회하고, 미안해하고 몸짓과 표정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고대 신의 이름, 혹은 신화의 타이틀 같은 느낌의 제목과 실제 연극의 내용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까.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에는 2003년부터 본격화된 아프리카 수단 내 다르푸르(Darfur) 지역의 대량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극중 피해 어린이의 엄마인 베로니끄는 다르푸르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에서 빚어진 만행에 대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는 사회운동가다.

야스미나 레자는 잔인한 살육의 이미지를 두 부부의 진흙탕 싸움과 중첩하면서 인간 내면의 파괴적인 광기(狂氣)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대학살의 신’ 공연 중 한 장면. ⓒ강일중

기본적으로 블랙코미디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장면들이 많다. 베로니끄(이지하 분)가 소파에서 점프해 남편 미셸(송일국 분)의 목을 두 다리로 휘감고 공격하는 액션도 그중 하나다. 싸움 와중에도 뻔질나게 전화질을 해대며 변호사 업무를 보는 남편 알랭(남경주 분)의 모습에 절망하며 먹은 것을 다 토해내는 아네뜨(최정원 분)의 장면은 거의 엽기적이다. 지성인을 자처하며 온갖 점잔을 다 빼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망가지며 상대방 비방에 혈안이 되는 네 명 등장인물 역의 연기가 볼만하다. 남편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튤립 화병에 처박으며 해방감을 느끼는 아네트의 모습은 이 세상의 많은 아내에게 통쾌감을 안겨줄 것으로 여겨진다.

공연은 자유소극장에서 3월 24일까지.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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