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도 리영희 선생님(전 한양대 교수, 언론인)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선생님 댁을 드나들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선생님의 세상을 보는 혜안과 불의에 대한 추상같은 비판정신과 강직한 성품이야 뵙기 전에도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지식인들이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사상의 스승, 처음 뵐 때는 좀 겁나기도 했다. 감시와 투옥과 해직을 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민주투사이자 명철한 저술가를 뵈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뵌 선생님은 그야말로 상상초월 매력이 넘치는 분이었다. 늘 유머를 던지시고, 산에서 새들에게 모이를 주면서 천진하게 좋아하시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소탈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중에 사모님께 듣기로는 선생님이 원래는 훨씬 더 엄한 성격이셨는데, 일흔 즈음에 뇌졸중을 겪고 회복해 나가시는 과정에서 많이 부드러워지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생님이 제일 부드러워지셨을 때 만난 행운까지 누렸다. 그 전에 뵈었다면 아마 꾸중 들을 일도 많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어른으로서의 권위의식이 없으셨다. 몇 주 바빠서 연락을 드리지 못해도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어느 날 쓱 전화를 하셨다. “어째 소식이 없길래 궁금해서. 어디 아픈가?” 우리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얼른 달려갔다. 한두 잔에 기분이 좋아지시면, “우리 인생의 이런 아름다운 순간순간을 축하하면서!”하고 축배를 하셨다. 그 감동적인 축배사를 배워서 우리의 영원한 축배사로 삼았다.

건강문제로 내가 정년을 십년이나 남기고 퇴임했을 때, 주변에서 여러 가지로 걱정을 했다. 휴직했다가 돌아오지 왜 그만두느냐, 당분간만 좀 살살하면 되지, 등등. 가장 멋진 위로는 선생님에게서 왔다. “진경선생, 퇴임을 축하해요! 무거운 책임을 벗으니 아, 얼마나 시원해. 나는 아주 날아갈 듯이 시원했어. 이제 자유롭고 멋지게 제 2의 인생을 살아요.”

선생님은 자신의 진보적인 사상과 일관성 있게 여성인권을 존중하고 옹호하셨다. 누가 성차별적 발언을 하면, 어째 젊은 사람이 나만도 못하냐고 꼭 한마디 하셨다. 펜 하나를 무기로 투사처럼 살던 시절에 가족의 일은 사모님이 다 하시게 했던 것을 못내 미안하게 여기셨고, 불편하신 팔순의 몸으로 사모님을 위해 가끔 설거지도 하셨다. 끊임없이 공부하시고,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어도 하시고, 어느 날 절필선언하고 후련해하시던 것까지, 늘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서 뵐 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다.

2007년 한반도에 대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정권이 들어섰을 때, 선생님은 “역사는 시계추처럼 흔들리면서 나아가는 거야. 저쪽으로 한참 가보면 이쪽으로 다시 오게 되지. 역사의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선생님은 2010년 12월 저세상으로 가셨다. 선생님 댁의 불 꺼진 창문을 보면서 선생님을 여읜 상실감에 망연자실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슬픔은 조금씩 엷어졌지만, 가끔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선생님, 시계추가 저쪽으로 가더니 안 오네요. 언제나 이쪽으로 다시 올까요?”라고 질문도 하고 싶었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스승은 떠나시고, 긴 겨울은 추웠다.

촛불이 전국을 밝히고 탄핵에 이어 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우리는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을 하던 날, 감격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그리운 선생님, 평화가 오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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