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마타하리>

발레 ‘마타하리’
발레 ‘마타하리’

올해 초 국립발레단에서 시즌 레퍼토리 목록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하반기에 공개할 신작 <마타하리>였다. 국립발레단의 의뢰를 받은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는 강수진 예술감독이 처음에 제안한 1993년작(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강수진 주역으로 초연됨)이 아니라 지난해 마타하리 사망 100주기를 맞아 새롭게 공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조건으로 의뢰를 수락했다.

마타하리는 오늘날 이중스파이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인물이지만 지난해 공개된 자료들은 그녀가 받아온 스파이 혐의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그녀는 스파이가 아니라 전쟁으로 대립하던 국가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이 낳은 희생양일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는 마타하리에게 씌워진 스파이 혐의가 부당하다면서 그녀를 남성들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던 여성 해방의 선구자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마타하리의 본명은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다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주둔장교의 구혼 광고를 보고 인도네시아로 건너간다. 그러나 군인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그녀는 이혼한 뒤 유럽으로 다시 건너와 파리 물랭루즈의 쇼댄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인도네시아어로 ‘태양’이라는 뜻의 마타하리란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부터다. 마타하리는 당시 유럽에서 보기 어려웠던 벨리 댄스 스타일의 이국적인 춤으로 물랭루즈 최고의 인기 댄서로 주목받으며 뭇남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애정을 갈구하는 남성들 중에는 프랑스 군부와 정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 관료들과 재계 인사들, 네덜란드 수상에서부터 프로이센 황태자까지 유럽 사교계 화제의 인물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부와 인기를 누리던 것도 잠시, 그녀는 세계대전의 그림자가 짙어지던 1917년,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이중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다.

마타하리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창작자들에게 숱한 영감을 제공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32년작 그레타 가르보의 주연작에서부터 85년작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작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고, 마타하리 100주기를 앞둔 2016년에는 그녀의 모국인 네덜란드에서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테드 브랜드슨에 의해 발레 <마타하리>가 올려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보유한 포르투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소설 『스파이』로 그녀의 인생을 옮겼다.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는 뮤지컬 <마타하리>가 제작되어 관객들과 만났다.

마타하리의 인생을 다룬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마타하리의 관능미와 불행에 대한 ‘꼼꼼한’ 전시다. 왜 작품에서 그녀의 관능과 불행을 전시하느냐는 물음에 마타하리가 실제로 관능적인 춤을 추었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마타하리의 몸을 드러낼 듯 말듯한 관능에 찬 춤으로 시선을 끌고 그녀가 얼마나 불행하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작품의 성공을 담보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좀 더 솔직한 답변이 될 것이다.

때문에 마타하리의 리메이크는 그녀가 얼마나 관능적인 춤을 추었고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았는지에 집중한다. 그녀가 관능적인 춤으로 승부해야 했던 이유나 그녀의 불행이 어디서 기인했는가라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받는 과정을 전시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설득하려 한다.

마타하리의 불행한 인생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뮤지컬 <마타하리>는 그녀가 성폭력 피해자라는 설정을 추가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유발시킨다. 그녀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에서 성폭력을 행한 누군가를 가공해 넣지 않더라도 광고를 통해 맺어진 그녀의 결혼이, 그리고 그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 과연 그 안에 성폭력의 개입이 없었으리라 추론할 수 있는가? 유럽 사교계의 명사들이 그녀에게 구애해올 때, 숭배로 가득 찼을 그 구애의 행위에 성폭력의 요소가 없었으리라 추론할 수 있는가? 시대가 만든 피해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마타하리를 복권시키기 위해 그녀를 다시 성폭력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창작자의 윤리적 감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반면 발레 <마타하리>는 발레뤼스 입단에 실패한 에피소드를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사용해 그녀에게 좌절의 경험을 한 겹 더 얹어주었는데, 발레뤼스 구성원들이 러시아 황실발레단(현재의 마린스키발레단) 최고의 무용수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춤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이 클럽에서 쇼댄스를 추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던 마타하리의 발레뤼스 입단은 애초에 가능성이 희박한,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진지한 소재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에피소드다. 발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왜 발레뤼스와 연관된 에피소드가 이처럼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나, 발레 무용수로 활동했고 이제 발레작품을 만드는, ‘발레 전문가’인 안무가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마타하리’라는 콘셉트를 신작 안무에 삽입했다. 마타하리의 좌절에 너무 진지하게 몰입한 결과다.

불행한 여자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문화예술계(대중문화를 포함해)에 이처럼 넘치는 것은 불행한 여자는 만드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안전하고 익숙할 뿐 아니라 흥행을 담보해주는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그녀의 불행을 보고 눈물지음으로써, 만드는 사람은 불행한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복권을 자처하는 구원자로 나섬으로써 만족감을 얻는다. 양자의 만족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불행한지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다.

다시 질문해보자. 창작자들은 왜 불행한 여성을 좋아하는가. 혹시 여성의 불행한 인생을 창작물로 재구성해 그녀가 고통받는 과정을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가 고통받는 과정을 왜 보고 싶은가. 세상이 짓밟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애가 작용한 건 아닐까. 그녀를 구원해줌으로써 창작물 안에서나마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기억해야 할 것은, 불행한 여자는 내 창작에 영감을 주기 위해 그렇듯 불행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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