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속으로] 폭력-외면-폭력의 악순환
[공연속으로] 폭력-외면-폭력의 악순환
  • 강일중
  • 승인 2018.12.10 19:14
  • 수정 2018-12-11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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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두영 연출의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강일중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강일중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불법구금과 고문·학살 등 온갖 종류의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던 곳으로 악명 높다. 지금은 교도소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극악무도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에는 반정부 활동 혐의를 받았던 수많은 이라크 인이 이곳에서 무자비하게 희생됐다. 2003년 봄 미국 주도의 이라크 공격 이후에는 미군이 이라크인 재소자들을 상대로 추악한 성폭력과 성적 학대를 한 사실이 언론보도로 드러나면서 더욱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막다른 곳의 궁전’(주디스 톰슨 작/마두영 연출, 11월 29일~12월 16일, 대학로 나온씨어터)은 그 시기에 이라크 독재정권과 일부 미군이 저지른 폭력과 인권유린 등 만행의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연극이다.

무대에서 당시의 사건이 사실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이 작품은 세 편의 독백으로 구성됐다. 세 인물은 모두 자신의 독백 장면 때 시선을 객석으로 향한 채 가학 심리, 공포와 전율의 순간들을 별 동요가 없는 어조 속에 토로한다. 그들이 전하는 과거의 상황들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배우의 몸짓과 말을 놓치지 않고 쫓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다.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나르자스 역의 이지현 배우. ⓒ강일중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나르자스 역의 이지현 배우. ⓒ강일중

3인은 모두 실존 인물들로 첫 독백 장면에 나오는 미군의 이라크 침공 당시 여군 린디 잉글랜드만 현재 생존해 있을 뿐 두 번째 장면의 영국인 미생물학자이자 무기 검사관이었던 데이비드 켈리, 세 번째 장면에 나오는 ‘나르자스’라는 이름의 이라크 여성은 의문의 자살이나 폭격으로 사망했다. 작가는 이들이 관련된 사건을 토대로 여러 증언을 종합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다큐드라마 성격의 작품이다.

‘나의 피라미드’라는 소제목을 가진 제1 독백 장면에서 린디 잉글랜드는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포로 학대 행위로 군사재판을 기다리면서 감금된 상태. 그는 과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잘못된 자기 확신에 차 있다. 린디는 수용소 포로 학대 행위가 알려졌을 때 재소자의 목에 개끈을 매어 끌고 있거나 완전히 발가벗긴 포로들 앞에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웃음 짓고 있는 사진들이 자주 공개됐었던 인물이다. 관심 가는 대목은 작가가 린디를 분명한 가해자이면서도 동시에 미국 사회 또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조직 속의 한 ‘희생자’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여성으로서 사회나 군대에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동료들의 학대 행위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더 끔찍한 가학 행위를 만들어냈다는 관점이 그의 독백 속에서 읽힌다.

‘해로우다운 언덕’이라는 제목의 제2 독백 장면에서 무기 검사관 데이비드 켈리는 딸과 자주 산책을 했던 숲 속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제시했던 대량파괴무기의 위협이 사실은 윤색된 것이라는 정보를 언론에 제공했다가 영국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아왔던 인물. 그는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후 죽어간다.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데이비드 켈리 역의 김용준 배우. ⓒ강일중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데이비드 켈리 역의 김용준 배우. ⓒ강일중

제3화 ‘갈망의 도구들’에 등장한 인물은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 때 저항세력에 가담한 남편을 둔 나르자스. 남편이 숨은 곳을 밝히라는 이라크 비밀경찰의 요구와 불응에 따른 끔찍한 고문에 대해 나르자스는 담담한 어조로 찻잔을 앞에 두고 얘기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린 자식에 대한 잔인한 폭력, 아들 앞에서 강간당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 등이다.

작품은 세 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일관되게 실제 일어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결국 폭력 등 악행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점을 얘기한다.

무대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혼자씩 사용하거나 때로는 공유하는 세 곳의 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거울. 세 공간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거울이 벽에 걸려 있거나 의자 위, 또는 천장 위에 매달려 있다. 얼룩져 더럽혀지고 물체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는 거울들이다. 추악한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재와 저 너머의 다른 세계를 가르는 경계를 상징하는 듯한 오브제다.

전부가 독백으로 이뤄진 연극이니만큼 배우들의 연기력이 작품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린디 잉글랜드 역의 이진경, 데이비드 켈리 역의 김용준, 나르자스 역의 이지현 배우가 모두 쉴 틈 없이 긴 대사를 치며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제목 ‘막다른 곳의 궁전(Palace of the end)’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 시절의 고문실들이 안에 설치되어 있던 옛 왕궁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린디 잉글랜드 역의 이진경 배우. ⓒ강일중
연극 '막다른 곳의 궁전' 중 한 장면. 린디 잉글랜드 역의 이진경 배우. ⓒ강일중

 

 

강일중 공연 컬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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