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젠더와 법 연구소’ 19일 창립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불가능한가?
증오와 혐오는 인권과 양립할 수 없어

전수안 사단법인 올 젠더와 법 연구소 대표가 19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열린 사단법인 올, 젠더와 법 연구소 창립기념컨퍼런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전수안 사단법인 올 젠더와 법 연구소 대표가 19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 페럼홀에서 열린 사단법인 올, 젠더와 법 연구소 창립기념컨퍼런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이정실 여성신문 기자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 전수안 전 대법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19일 ‘사단법인 올 젠더와 법 연구소’를 창립하고 ‘젠더와 법, 과제와 전망’이란 제목의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연구소 대표를 맡은 전수안 전 대법관의 인사말 전문을 소개한다.

젠더와 법은 알겠는데 올은 무엇이냐 물으십니다. 특정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열린 공간을 뜻합니다. 한올 한올 다가올 미래를 엮어갈 무한한 여백, 아크로폴리스보다는 아고라를 꿈꾸는 광장입니다. 무엇을 위한 광장인가. 여성의 인권? 아닙니다. 양성만 평등한 세상? 아닙니다. 모든 성을 아우르는 인권과 행복을 추구합니다. 젠더를 고리로 행복, 행복한 삶, 평화로운 세상이 궁극의 목표입니다. 젠더는 그에 이르는 통로. 좁은길과 큰길이 만나는 길목, 변화를 이끄는 하나의 모멘텀입니다.

인문 사회 철학 종교 의학 어느 하나 젠더에 관련되지 않는 분야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법인가. 어쩌겠습니까. 아는 게 법 밖에 없는데. 다른 분야의 지혜로운 분과 교류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우선은 법학자와 재야 법조인이 모였습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불가능한가? 새롭지 않아 새삼스러운 질문이지만 모두가 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으므로 그저 또 하나의 시도를 보탭니다. 목표를 이루겠다는 목표도 없고 다른 시도와 다르다는 오만도 없지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가자는 생각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므로 포기하지 않을 뿐입니다.

연구소가 모을 수 있는 것은 힘도 아니고 큰 목소리도 아니고 지혜입니다, 군중의 함성이 아니라 지혜가 아고라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탁월한 지성과 이성을 갖춘 법률가가 민법, 형법, 가족법에 온갖 특별법까지 다 적용해서 도출한 결론이 왜 때로는 헌법과 국제인권법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지혜다운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함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구심점 된 것은 전효숙 선배와 강금실 후배입니다. 전효숙, 강금실 전수안 셋이서 뭔가 함께 해보자는 것은 5년도 넘은 해묵은 생각이었습니다.

입으로는 재밌는 일을 말했지만 후배에게 도움 되는 것을 찾는 것이 속내였습니다. 책방 사랑방 수준의 구상이 오가다가 원의 이유정 변호사, 지향 김진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생각이 형태를 갖추게 됐습니다.

내면에 품은 화두는 관용과 포용입니다. 난무하는 혐오와 증오는 배제의 레토릭입니다. 인권의 쟁취에 있어 어느 정도의 대립과 투쟁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증오와 혐오는 인권과 양립할 수 없고 효과에서도 역기능을 합니다. 목표가 인권이라 하더라도 방법에서 증오와 혐오가 수반되면 그 자체로 이미 반인권적입니다. 배제와 차별, 관용과 포용은 젠더와 법을 관통하는 일관된 연구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연구소의 역할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 제대로 묻는 것에 두고자 합니다. 자연과학에서 밝혀진 것도 우주의 4%뿐이고 나머지 96%는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로 둔다지요.

뢴트겐의 엑스레이도 처음엔 잘 몰라서 엑스라고 붙였고, 그보다 더 잘 알 수 없을 것 같은 리처드 파인만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원칙을 넘어서는, 증명되지 않는 상상력을 경계한다고도 했습니다.

원자의 존재를 규명하는 일이 이럴진데, 사람의 일을 다루는 일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옳다고 우기는 것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주장과 다름없을 터. 그리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 확증편향입니다.

연구소에 임하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준비된 답은 없고 정답을 제시하겠다고 말할 수 없지만 모두가 안다고 할 때 과연 그럴까 의문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모른다는 말도 용기내어 할까 합니다. 공룡박사 토마스 홀츠는 때로는 모른다가 때로는 제일 좋은 답이라고 했습니다.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를 경계하되 모르는 것은 안다고 우기지 않고, 제대로 알기 위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 거기까지가 연구소의 역할입니다. 한계이기도 하지만 질문에 답할 지혜를 기다리는 일에 설레기도 합니다.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습니다. 잘 몰라서 한번은 했으나 알고서는 다시 할 수없는 일, 저는 제 직업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리 생각합니다. 여성후배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법조인이 되고, 결혼도 하겠냐고. 후배는 질문이 끝나기 전에도 답했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아요. 답이라기보다 비명이었습니다. 다시 하고 싶은 일을 몰라서였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다면 실패한 삶을 산 것인가. 한국일보 이윤주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른의 조언이 청춘의 불안을 해소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험이 너의 삶에 아무런 교훈이 될 수 없음을 헤아리는 태도를 기대한다. 나의 경험이 너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노파에게 그가 제시한 말은 이랬습니다. ‘너의 말에 귀기울이고 나의 언어를 바꾸겠다’는 기득권의 변화. 제임스 도티의 말도 비슷하면서 솔깃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야기의 핵심으로 가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서로 닮아있다.”

유대감은 강한 힘입니다. 짧은 만남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영원히 바꿀 수 있다.누군가의 삶을 영원히 바꾸는 만남, 연구소가 그런 만남의 장소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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