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구슬픈 희망을 노래한다

본지는 이번호부터 삶의 현장에서 억척스레 뛰고 있는 여성들을 발굴 소개합니다. 온갖 풍파와 난관을 견디며 자신의 인생을 일궈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새시대 역동적인 여성상을 구해 보자는 뜻입니다. 주변에 오뚝이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면 주저말고 <여성신문>에 알려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삶을 가치있고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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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싸고 푸짐한 안주와 인심으로 충무로 인쇄골목의 ‘전설’로 통했던 인현순대 주인 김경애씨. 사고로 전신불수가 된 남편, 점점 줄어드는 손님에 그의 시름은 깊지만 손주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고 다짐한다. <사진·민원기 기자>

# 아주 오래된 금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네 어머니와 딸들의 고단한 삶을 나눠지고자 했던 이들이라면 한번쯤 읊조려봤을 오래된 경구다. 의욕이 앞선 사람에게 이 금언은 자신의 여성주의를 옹위하는 ‘전가의 보도’였지만, 세상 절반의 절규를 외면했던 사람에겐 ‘그들만의 항변’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제 논에 물대기’라고 하던가. 2500여년전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원래 덜고 더함이 없었다. 석가는 ‘무소(코뿔소)의 뿔처럼...’의 출전 숫다니파타(단편 1149수 묶음)에서 이 이름난 구절 몇 수 뒤에 이렇게 설파했다.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의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지아비와 지어미는 그래서 ‘황소’의 뿔처럼 나란히 가는 것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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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일과는 아침 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다. 손과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그의 격무를 말해준다. <사진·이기태>

# 충무로 순대아줌마의 이름으로

대한극장 건너편 인현시장에서 30년째 순대국밥집(인현순대)을 하고 있는 김경애(62)씨는 법당은커녕 일주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불교경전 한 번 본 적 없는 그지만, 40년 고락을 같이 한 남편과 자신이 서로에게 ‘총명한 동반자’였음은 몸소 겪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요즘처럼 허망한 때가 없어요. 이리 앉아도 한숨, 저리 서도 한숨뿐이에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인생 동반자이자 사업 동업자였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식물인간으로 누운 탓이다.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술에 취해 들어왔어요. 그런데 다음날이 되도 깨어나질 않아. 그러더니 막 토악질을 허대. 부랴부랴 병원으로 갔지만 이미 늦었대. 늦었어.” 김씨에겐 이제 마른 눈물조차 나지 않는 기막힌 과거사가 돼버렸다.

# 기막힌 사고

2001년 6월 어느날. 김씨의 남편 유영근(64)씨는 고된 하루 일과를 동료들과 한잔 술로 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세 딸을 일찌감치 출가시켰고 순대국밥집 수입도 내외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람 좋은 유씨는 그저 친구들이 좋아 1년 전부터 건설업체 관리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공사판에서 흘린 땀은 원래 삼겹살에 소주로 식히는 법. 주거니 받거니 술이 거나해진 유씨가 집 앞에 도착한 건 자정 무렵이었다. 흐린 눈에 웬 젊은이들이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선 게 보였다. -자네들 무슨 일인가? “...” -왜 남의 집 문 앞에 섰냐구. “뭐야, 이거.”

대화는 곧 끊겼다. 다혈질인 동네 젊은이들은 술 취한 유씨를 이웃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다짜고짜 내팽개쳤다. 대문앞 선돌에 머리를 찧은 유씨는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귀소본능 덕일까. 유씨는 용케 깨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깨어나지 못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놀란 김씨와 세 딸이 유씨를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때를 놓친 상태였다. 뇌진탕 진단이 나왔고, 몇 번이나 뇌수술을 했지만 유씨는 1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뒤 유씨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눈꺼풀뿐이었다.

기나긴 투병이 시작됐다. 물리치료가 계속됐지만 고통만 늘어갔다. 온갖 약과 뜸에 침을 수없이 꽂아도 유씨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002년 추석을 열흘 앞두고 유씨는 결국 퇴원했다. 병원에서 만 1년을 보낸 뒤였다. 전신불수가 된 남편과 병원비 3000만원 청구서가 김씨에게 남은 전부였다.

# ‘인현순대’의 전설

인현순대는 충무로에서 ‘전설적인 대포집’으로 통한다. 김씨와 유씨가 내는 안주상이 그 값에 걸맞지 않게 과했고, 낯이라도 익을라치면 공짜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0년전 3500원이었던 순대국밥, 4000원이었던 돼지머리고기 값은 지금도 그대로다.

“돈 없는 학생, 주변 인쇄공장 아저씨들이 많이 왔죠. 나도 돈 없어 고생해 봤는데 어찌 비싸게 받아. 아저씨도 오죽 사람들을 좋아했어야 말이지.” 굳어있던 김씨 얼굴이 모처럼 환해졌다. 학생들에게 공짜술 내주는 남편이 참 미웠지만, 정작 술을 내온 건 김씨 자신이었다.

“학창시절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돈은 없고, 술은 고프고 참 고달팠죠. 그 때 마침 유씨 아저씨를 만났죠. 우리를 보더니 대뜸 ‘같이 가자’는 거에요. 젊은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아저씨와 친구 셋이 그날 인현순대서 밤을 지샜습니다. 공짜로 말이죠.” 12년째 인현순대 단골인 이상(35·회사원)씨의 ‘증언’이다.

# 전주-서울, 제과점-국밥집

전북 함열이 고향인 김씨가 유씨를 만난 건 67년. 서글서글한 눈매가 맘에 들어 곧 결혼했고,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제빵기술자인 남편과 함께 전주에서 제과점을 시작한 김씨는 타고난 천성으로 금세 돈을 모았다. 5년 뒤 김씨는 당시 누구나 그랬듯 서울행을 택했고, 경기도 시흥에 첫 터를 잡았다.

인쇄소가 하나 둘 모여든 중구 인현동에서 장사를 시작한 게 72년께. 시장 ‘정서’에 맞춰 업종을 바꿔 인현순대 문을 연 것도 그 때였다. “오순도순 참 재미있게 살았죠. 아이들 커 가는 재미, 손님 늘어가는 재미가 괜찮았죠.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했어요. 가족들 건강하고 큰 걱정도 없었으니까요.”

지금 남산한옥마을이 들어선 자리에 그 때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있었다. 휴가복귀병들에게 인현순대는 전우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위병소 같은 곳이었다. 머리고기며 순대가 소대 단위로 팔렸다. 인근 동국대, 서울보건전문대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단골이 엄청나게 불면서 인현순대의 ‘영화’는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갑자기 손님이 끊기더라구요. 사람들이 시장 대신 할인점에 가고, 대포집 대신 호프집에 가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닭도 튀기고, 다른 메뉴도 만들어 봤지만 손님이 늘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가게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죠.”

# 2003년 1월 새 희망을 찾아

아무 탈없이 잘 살던 딸들에게까지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속상해요.” 유씨가 다친 뒤 망연자실한 김씨를 위해 은행원과 간호사인 두 딸이 병수발과 가게 일을 돕고 있다.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씨는 그런 딸이 고맙고 든든할 뿐이다.

“커 가는 손주들에게 할머니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정말 쉽지 않아요.” 남편 사고의 충격으로 심신이 무력해진 김씨는 시력까지 많이 나빠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게문을 닫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간판 내리지 않고 꿋꿋한 모습을 보이는 게 잊지 않고 인현순대를 찾아준 손님들과 남편 일로 도움을 준 이웃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 인현순대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뜨내기다. 몇 년 전부터 불어닥친 불황으로 수많은 인쇄소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보기 흉측한 머리고기나 순댓국을 더 이상 찾지 않는 탓이다. 십수년을 드나든 단골을 빼면 김씨의 순댓국은 진짜 ‘전설’이 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영환 기자ddarijoa@womennews.co.kr

▣ 취재 뒷얘기

김씨는 요즘 민사소송을 준비한다고 했다. 가해자가 재판을 받고 8개월 복역까지 했고, 청년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아 2년 가까이 망설였던 그다. 그러나 가해자가 미리 민사소송에 대비, 동네를 돌면서 자신을 항변하는 연판장을 돌리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잘못을 따끔하게 꾸짖는 게 그 청년 가족이나 우리 사회의 ‘도덕’을 위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노년에 접어든 그에게 소송은 쉽지 않은 일. 그는 법률적인 조언을 애타게 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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