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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뉴욕 태생으로 스탠포드대 인류학과를 졸업한 엘렌 드레이크 (Ellen Drake).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아프리카 남쪽의 조그마한 나라 ‘보츠와나’에서 맹렬한 삶을 살고 있었다. 엘렌은 넉넉한 몸집이었지만 구부정한 허리의 할머니가 아니라 빳빳한 부시맨의 허리와 후덕한 미소로 필자를 맞아 주었다.

엘렌은 ‘Africa fever’의 대표적 본보기일 듯하다. 1958년부터 2년 동안 인도에서 미국 국제개발협의회 위원 활동을 마친 엘렌은 25세 때인 1960년 히치하이크로 동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면서 아프리카 대륙의 매력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젊고 매력적인 그녀를 사로잡아버린 아프리카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영원한 연기’라고 하며 원주민들이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빅토리아 폭포의 웅장함도 그녀를 매료시켰으리라. 또 쭈글방태기 얼굴에다 어린아이 만한 체구, 소쿠리 엉덩이의 부시맨 여자도 흥미로웠으리라. 작열하는 태양도 그녀의 도전 정신에 불을 지폈으리라. 그러나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풍만한 자연과 그 자연을 수놓은 생물들이었다. 도무지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을 것 같았던 모래만이 가득한 불모의 칼라하리 사막에도 우기가 되면 생명이 잉태되고 강이 되어 물이 흐르기도 하고 그 사막의 한가운데에도 푸른 샘이 있다는 그리고 그 푸른 샘이 생명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습지와 늪과 사막이 공존하는 아프리카. 키작은 나무와 조그마한 벌레가, 또 하마와 악어가 공존하는, 코끼리와 사자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자연의 질서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 후 10년 뒤인 1970년 티 한 점 없는 한 장의 흰 캔버스 위에 오로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아프리카에서 찾게 되면서 동아프리카 전지역에 자신의 열정을 본격적으로 쏟아 붓기 시작했다. 1970년 탄자니아 정부의 침팬지 리서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아프리카 흉내내기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케냐의 사파리 회사에서도 근무했으며 에티오피아로 옮겨 정부 기업인 여행협회에서 근무하며 야생동물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1976년 보츠와나 정부 관광국에 근무하면서부터 보츠와나와 인연을 맺고 정착해 1983년 6월 보츠와나 정보통신부 근무를 끝으로 보츠와나 정부기관 근무를 마감하고 1983년부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보츠와나 교육부, 스웨덴 상사, 보츠와나 종교단체의 일 등을 수주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70년 이후 30년 넘게 그녀의 전 생애는 아프리카 자연에 대한 존경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넘친다.

인종차별과 자연파괴를 지독히 싫어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조금은 별나 보이는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기는 태양열을 이용해 자가 발전해 사용하고 있으며 정원에는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 잘 자라는 정원수들을 심어 물 사용을 극히 억제하고 있다. 가사용으로 쓰고 난 물은 집 뒤의 큰 물통과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집안에 있는 모든 채소로 보내진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애환이 담긴 수많은 전설을 가진 ‘바오밥 트리’의 전문가이기도 한 그녀의 삶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 속에서의 아프리카를 위한 아프리카의 삶 그 자체였다.

필자는 아프리카에서 또 하나의 때묻지 않은 자연을 발견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며 바로 그 때묻지 않은 자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엘렌 아프리카.’

문숙경 경북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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