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 스무 살 이후 내 대답은 똑같았다. “다 컸어.” 그리고 속으로 말한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다.’

다섯 살 때 내 꿈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일곱 살, 유치원에 들어간 내가 엄마에게 말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될 테야.” 초등학생이 된 여덟 살 무렵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 라고 말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장래 희망을 또 바꿨다. “중학교 가니까 과목마다 선생님이 달라. 신기해. 중학교 선생님이 될래.”

고등학생이 됐다. 나는 엄마에게 더 이상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부천의 고등학교는 비평준화 상태에 있었다.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부천시 최고의 선생님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들은 대학 진학률을 높이는 면에 있어서만 최고의 선생님들이었다. 어떤 남선생님은 학생이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경우 라이터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거나 귀를 잡아당기는 등의 체벌을 가했다.

또 다른 남선생님은 학생이 생리통 때문에 야간 자율학습을 빼 달라고 요구할 때 생리통 때문이라면 집에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 체육 선생님은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역설하며 “지금부터 욕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xx’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의 모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선생님에 대해 환멸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을 그들이 접게 만들었다는 식의 비겁한 책임전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일찍 만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남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생리통이라니,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혹은 “생리통? 왜 꾀병 부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평균적인 인간은 지극히 남성적인 관점에서 말해지는 ‘건전한 상식을 지닌 일반인’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억압받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주 강렬한 분노이기도 했고 속 타는 억울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한없는 무력감을 맛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것이 무척 비생산적이라는 점에서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 억압의 가장 근원적인 측면은 나로 하여금 나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는 데 끊임없이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어떻게 여성인 나를 긍정할 것인가. 어떻게 내가 나를 비롯한 여성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내가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기로 했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여성들과 함께 걸어간다면 내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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