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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아트를 붙인 긴 손톱, 귓불에 몇 개씩이나 뚫은 귀고리 구멍, 루즈 삭스와 블리치를 넣은 갈색머리, 1년 내내 선탠으로 태운 갈색 피부, 손 안에서 반짝거리는 핸드폰 - 복장, 헤어스타일, 말투에 있어 완벽한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고갸루(高girl)들. 후기자본주의 소비욕망으로 부글거리는 동경 시부야를 가차없는 시선으로 해부하는 마사토 하라다의 <바운스>에서 원조교제를 중심축으로 움직이는 고갸루들의 세계는 일본사회의 내적, 외적 균열을 가리키는 일종의 지진계로 작용한다.

‘절대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돈 버는 것’을 원조교제의 ‘준법정신’으로 내세우는 존코와 밤이 새도록 거리에서 춤을 추며 가끔씩 성인용 비디오 촬영에 응하는 라쿠. 그녀들은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로리타 신드롬에 빠져 연체동물처럼 허우적거리는 남성들과 별다른 심리적 동요없이 ‘교제’를 하며 돈을 벌어 브랜드 제품 소비에 몰두한다. 여기에 내일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 소녀 리사가 합류하게 된다. 착용했던 팬티와 교복을 팔고 난 후에도 모자라는 경비. 결국 리사가 비디오 촬영장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온갖 부패와 도착적 욕망으로 질식할 듯한 시부야와 이들 세 소녀 간의 치열한 대결이 시작된다.

대동아 전쟁 때 종군위안부 시스템 관리자로 살았던 삶을 계속 자랑스레 회고하는 의학박사, 일본은 여전히 위대한 국가의 통합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설교를 늘어놓으며 남성 변기를 닦으라고 강요하는 관료, 고갸루를 한쪽 눈이 실명할 정도로 두드려 패고 난 후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중년남성. 원조교제가 필요한 일본사회 가부장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비루하고 뻔뻔스럽고 무기력한,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피를 여전히 씻지 못하고 있는 속물들이다. 영화는 전적으로 고갸루들 편에 서서 일본 사회의 역겨움에 한껏 조롱과 분노를 터뜨리는 반면 세 소녀들의 우정과 치기, 꿈에는 지속적인 이해와 관대함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영화는 조금 유치한 아이러니와 모순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제 일본 사회에는 열정있는 고갸루가 단 한명도 없단 말이냐? 이 질문을 화두 삼아 시니컬하게 술잔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바로 지하섹스산업을 관리하는 야쿠자 오시마와 도착적 욕망들을 위해 페티쉬 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그의 동료 여성이다. 존코와 어깨동무를 하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오시마의 모습에는 이제 좌절과 패배, 영락 만으로 남겨진 60년대 말 좌파의 쓸쓸함이 배어있다. 해법은? ‘너희가 단 한 명의 의인이라도 내게 데려온다면 이 도시를 멸망에서 구하리라’는 식의 전설같은 믿음을 따르는 것이다. 즉 열정을 간직한 소녀 리사는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일본사회를 구하기 위해 ‘하면 된다’의 정신을 존중해주는 꿈의 도시, 뉴욕으로 가야 한다. 브랜드 상품을 보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손을 생각하게 된다는 리사야말로 마지막 희망의 불씨 아닌가. 그래서 존코와 라쿠, 야쿠자와 페티쉬 숍의 주인, 고갸루 알선으로 돈을 버는 소년, 이들 모두는 힘을 모아 리사의 탈출 경비를 마련한다.

경제공황과 윤리공황에 허덕이는 일본 앞에 갑자기 변용된 구원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미국. 전지구적 세계 재편성의 시대에도 유토피아적 대안의 환타지는 이렇게 빈곤하고, 지하철역에 남겨져 눈물을 흘리는 존코와 라쿠의 저 구체적인 슬픔에 응결되어 있는 고갸루들의 미래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옥죄인다.

김영옥 /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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