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비롯한 전세계 27개 도시에서 여성들이 아프간 침공 1주년을 기해 반전평화집회를 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이제까지 전쟁에 대해 공식적인 발언을 한 경험이 없었던 여성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모아 공개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여성들이 반전을 얘기해야 하는가.

똑같은 말도 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전쟁’이다. 대다수 남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일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초점이 모이기 십상이다.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에게 있어서는 전쟁 이후의 전리품에 관심이 쏠리고 전투에 참가해 피흘리는 병사들이나 그 가족들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종종 목격하게 된다. 군 지휘관들이라면 사회 속에서 군의 영향력 확대 여부, 신병기의 성능 여부가 관심사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대다수 여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늘 남은 자로서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차적으로는 생산력을 가진 남성들이 거의 대부분 전투요원으로 끌려가고 남은 가족들에 대한 생계책임은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난 후 어떤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전투에 참가한 남성들이야 결과에 따라 훈장이라도 주어지고 연금혜택을 누리는 나라들도 있지만 전쟁중 여성들의 가족 생존을 위한 처절한 노동은 종전과 더불어 곧바로 잊혀진다. 2차 대전 중 참전군인들을 대신해 생산현장으로 나갔던 여성들이 전후 “가정으로 돌아가자”는 사회적 캠페인과 더불어 사회에서 밀려난 것이 이후 미국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한 동기가 된 점을 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승전국이요 자국 영토가 파괴되지 않은 미국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국토가 폐허화된 나라들은 여전히 여성들이 가족 생계를 책임지며 황폐화된 심리상태를 안고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도 흔하다.흔히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은 생명을 걸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군인들은 양측이 서로 무기를 들고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적과 아군만 있는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으로서 여성들은 일방적 피습, 피폭의 대상이 되는 일이 흔하다. 특히 전선없이 자행되는 현대전에서는 더욱 더 민간인 피해가 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적군에 의해서는 물론 자국 군대에 의해서도 여성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전장에서의 군인들은 상당 정도 이성이 마비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살벌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도 어려우니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그런 군인들의 심리 상태는 가까이 있는 약자로서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 강간 등의 범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상에서라면 큰 범죄인 이런 행위들이 전쟁 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묵인된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자기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쯤으로 치부하고 TV화면을 통해 전쟁의 참혹상이 전해져도 잠시 가슴아파하는게 고작이다. 그나마 대다수는 재빨리 채널을 돌려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전쟁은 먼나라에서 발생했다고 해도 결코 남의 얘기로 그치지 않는다. 우선 당장 세계경제가 어려움을 겪는다. 중동전의 경우 비록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에너지 파동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원빈국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우 심각해진다.

게다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간단한 경제상식으로 알고 있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구는 여성들의 지위변동에도 대입된다. 좋은 쪽으로 변하기보다 나쁜 쪽으로 변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승전국이 얻는 전리품-현대전, 특히 중동전에서는 석유자원이 최대 전리품이다-은 정치가들을 전쟁에 중독되도록 하는 일종의 마약이다. 군수산업체들은 또 그들대로 정치가들에게 각종 로비를 벌여 그들의 생산품을 타국에서 소비하도록 부추긴다. 군수산업과 석유장악은 미국같이 에너지 소비가 막대한 나라에서 국가경제를 일시에 부흥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전세계적인 국가 영향력의 확대도 정치가들을 고무 격려해 끊임없이 새로운 전쟁터를 개발하도록 부추긴다.

그렇다면 중동 다음으로 미국이 군침을 흘릴 전장은 어디인가. 세계는 한반도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우리에겐 이처럼 서울에서 세계 여성들과 발맞춰 반전평화운동을 벌여야 하는 매우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홍승희/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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