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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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다분히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에 대한 논쟁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신간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존 콜라핀도 지음/바다출판사)은 성이 ‘타고난 것인지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거나 입장을 피력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성을 강요받았던 한 인간의 인생을 추적함으로써 비인간적인 의학계의 비리와 지식인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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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살 무렵의 쌍둥이 브렌다(오른쪽)와 브라이언. 일란성 남자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사고 후 브렌다는 여성으로 성전환했다.

성기 중심적 사고가 낳은 비극

1966년 캐나다 위니페그의 한 대형 병원에서 일란성 쌍둥이 중 형인 브루스 라이머는 의료사고로 페니스를 잃게 된다. 부모는 당시 생후 8개월이던 브루스를 안고 성전환수술 전문가 존 머니 박사를 찾아가고 그로부터 성전환수술을 강력하게 권유받는다. 결국 고민하던 부모는 성기가 없는 남성으로 자람으로써 이 사회에서 아이가 받게 될 고통 등을 예감하며 생후 22개월 된 브루스에게 성전환수술을 시킨다. 그리고 그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브렌다’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는다.

단지 사고로 절단된 ‘성기’ 탓에 필연적인 귀결처럼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은 브렌다는 지속적으로 존 머니 박사의 유효한 실험대상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브렌다’는 14세가 되던 해 자신이 겪었던 사고의 진실을 듣고 16세에 비로소 ‘데이비드’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성을 선택한다.

결국 그는 성기 중심적인 지배 사고의 폭력성으로 인해 모든 선택권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감히 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남성의 상징이자 핵심인 ‘성기’가 삭제된 인간이 과연 정상적인 남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저자가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집요하게 추적한 사실의 기록이다. 인간의 성은 후천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한 성전환 전문가의 비인간적인 실험에 희생당했던 한 인간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이 책은 머니 박사의 기만적인 실험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증명하고자 했던 ‘환경 결정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끔찍한 흉터가 있고 생김새가 불완전한 생식기, 남자 같다고 놀려대는 친구들, 생식기와 성 정체성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했던 연구자들, 항상 뒷전 취급을 당하는 여성의 지위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브루스 라이머가 폭력적인 실험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편견에 가득 찬 사회의 시선 속에서 느꼈던 외부 권력의 영향력 역시 무시되지 않고 기술된다.

섣부른 결론의 위험성 경계

그러면서 이 책은 결국 ‘선택’의 문제를 넌즈시 시사한다. 즉 궁긍적으로 ‘성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사고로 성기를 잃었지만 단지 그 이유로 ‘자신의 성을 선택할 권리가 배제된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당사자의 의지가 배제된 성 정체성에 대한 탐구나 섣부른 결론은 결국 폭력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성을 비로소 찾아나가고 ‘선택’했던 한 인간의 투쟁을 ‘생물학적 결정론’의 우월성에 손을 든 필연적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에 자신의 성을 ‘선택’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나 이해 없이 ‘변종이며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반인권적인 횡포를 저지르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한 인간을 실험대 위에 놓고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이분법 속에서 정답을 향해 달려가던 그들처럼.

저자 역시 발문을 통해 ‘환경이 아니라 천성이 성을 결정한다’는 식의 서평이나 ‘후천적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 여성을 위해 건전하다’는 판단 모두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하면서 “논리를 갖고 탁구 치듯이 토론을 주고받는 것보다 그 논쟁을 넘어서는 메시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논쟁이나 연구란 얼마나 한 인간을 피폐하게 무너뜨리는가. 만약 ‘브루스’로 태어나 ‘브렌다’의 삶을 강요받다 ‘데이비드’를 선택한 그를 만난다면 우리는 ‘당신은 원래의 성을 되찾았군요’가 아니라 ‘당신은 비로소 당신의 성을 선택했군요’라고 미소 지으며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문이 정민 기자 knnif@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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