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숙/ 이화여대 국제 대학원 교수 choks@ewha.ac.kr

학교 건물을 나서는데 건물 아래 돌계단에서 유치원생 둘이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계속 이기는 바람에 한참 올라왔고 다른 아이는 바닥에서 고개를 꺾어 그 아이를 힘겹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위에 있는 아이가 이기니까 아래에 있던 아이는 “나 안할래” 하면서 그냥 계단을 걸어 올라와 버렸다.

순간 나는 미국 유학시절 가졌던 미국사회에 대한 찜찜한 느낌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미국사회는 자원봉사와 기부문화가 일상화돼 있는 곳이다. 심지어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우리에게도 수시로 기부하라는 안내장이 날아들곤 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할 아이의 생활형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고 나면 미국 대학에서 받는 장학금으로 서울에 있는 식구들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우리의 어려운 처지가 호사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매월 니카라과 어린아이에게 식비를 보조하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래서 미국사람들이 봉사를 하는구나.” 하지만 좀 더 그곳에서 살다보니 미국인들이 좋은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기쁨 때문에만 봉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가구를 싸들고 이사를 하는 대신 가까운 종교단체에 기증을 한다. 가구 값은 넉넉하게 쳐져서 연말 세금공제혜택을 받게 된다. 이사를 하느라 비용들이고 고생을 하는 것보다 세금공제 받은 돈으로 새 가구를 장만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다. 자원봉사도 중류층 이상 상류층들의 소일거리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 때문에 체면유지를 위해서는 자원봉사를 생활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생기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하층민들이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자본주의가 오래 지속되면 부익부 빈익빈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서 부의 재분배를 시도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국민들 스스로가 시장에서 도태되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속해서 지기만 하는 아이가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계단 위에서 자만했던 아이에게 가장 치명적인 실패를 안겨준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자신의 재산을 확고히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층민들이 게임의 규칙을 뒤엎지 않을 정도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국 문화가 내게는 뭔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계층이 다른 사람은 얼굴 한 번 마주칠 수 없도록 격리된 삶을 살아가면서 봉사와 기부를 생활화하는 그들의 자비가 내게는 약간은 위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정한 봉사는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높게 담을 쌓고 경비원을 세우면서 자선행사에 나와 행세를 하는 것이 내게는 어색하게 보였다.

우리야 미국과 같은 기부나 봉사문화가 제도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막연히 우리사회가 훨씬 더 건강하고 끈끈해서 좋았다. 학위가 끝나고 미련없이 귀국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민초들의 건강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믿음은 현실로 드러났다.

국가환란을 맞아 금모으기 운동을 할 때 장롱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금붙이를 아낌없이 들고 나온 서민들의 애국심에 목젖이 아릿했다. 수해를 당한 먼 동네 이웃을 돕겠다고 나선 우리 젊은이들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재난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가가 이렇게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없는 민초들의 애국심과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다. 민초들의 봉사와 애국심은 나에게 어떤 단기적, 장기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는 상류층이 체제유지를 위해 베푸는 시혜와는 거리가 한 참 먼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상류층의 도덕성없이도 사회질서를 유지해 왔는가. 상류특권층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은 하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하층민끼리 갈라져서 반란하지 못하도록 분열작전을 쓰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도 속국의 국민에 대해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차별정책을 쓰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의 영호남 지역주의도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화된 것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남성의 주장이나 백인이 좌절한 흑인에게 성공한 흑인을 질시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상 국무총리서리가 국회인준에 실패했을 때 나는 홍콩에 있었다. 홍콩대학 총장은 한 마디로 그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지만 국내 언론과 시민단체는 우리 사회에 도덕성이 바로 서는 것처럼 기뻐했다. 여성마저도 장 전총장을 부도덕한 상류층의 전형인 듯 외면했다. 사실 우리 언론이 소설 쓰는 수준에서 기사를 쓴다는 사실을 폭로하느라 책을 한 권 쓴 나마저도 나중에는 언론의 보도에 감쪽같이 속았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장 전 총장은 전형적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총리서리로 지명되고서도 늘 다니던 산동네 미장원을 찾고, 2002년에 94년형 소나타를 탈만큼 검소한 이들 부부가 모은 재산이 억대라는 이유만으로 상류층이라고 매도해도 괜찮은가. 정말로 서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특권층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혈안이 된 재벌언론의 거짓말 놀음에 놀아난 우리 서민들이야말로 두 국민 분열작전의 희생양이다.

우리 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류특권층에게 사회적 책무를 일깨워줘야 한다. 하지만 민초들이 두 국민 분열작전에 번번이 속는다면 상류층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진정으로 서민을 대표할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 우리 민초들에게 부과된 또 하나의 책무다. 우리는 이래저래 민초가 없으면 안 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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