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폭력, 그 불편한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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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와 막 세번째 ‘깜빵’을 다녀온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는 영화 <오아시스>에는 ‘오아시스’가 있다. 방울새에 ‘방울’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함부로 곡해할 수 없는 선한 의도와 진정성에의 세심한 헌신, 그리고 디테일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겸손한 태도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결국’ 관객들을 설득시키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오아시스를 향한 짙은 목마름이 나름대로 해소됐다는 증거일 것이다. 영화는 한국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이른바 소시민들을 일방적으로 고발하거나 몰아대지 않고 그들의 양면성을 가감 없이 포착해 낸다. 불가능의 지점인 그 소시민성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기적처럼 오아시스의 샘을 판다.

여자는 남자를 장군이라 부른다, 남자는 여자를 공주라 부른다. 이 여자는 이 남자 아니면, 이 남자는 이 여자 아니면 그 누구하고도 관계 맺거나 소통할 수 없었을 거다, 사랑은 더더군다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 앞에서 섹스를 한다, 부끄러움이나 불편함 없이. 그들에게 여자는 개나 고양이 혹은 벽에 걸린 시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것, ‘꿈’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나는 네가 싫어, 너는 쓸모 없는 인간이야’를 되풀이해서 말한다. 남자를 가능한 격리시키려 한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것, ‘마음’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이제 두 사람은 만나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왜 이 두 사람이라고 ‘그’ 행복을 누리면 안된다는 말인가. 이것이 영화의 논리이고 항변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일체의 자본주의적 상품 물신적 교환경제의 혐의에서 벗어나 있다. 꿈과 마음이 만났으니 이보다 더 순수하고 더 풍성한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영화는 힘겨운 과제를 껴안고 끝까지 비틀거리며 고통스러워 한다. 영화가 전반부에서 충분히 ‘장군’의 캐릭터, 실존적 환경을 설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홀로 빈집에 남겨진 뇌성마비 신체장애자 ‘공주’를 덮쳤을 때(이런 경우 늘 쓰이는 단어가 바로 ‘덮치다’이다. 장군의 경우에도 어쩔 수 없다.) 이 사랑 이야기는 만만치 않은 부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징역 2년 6개월을 살다 나온 남자가 홀로 남겨진 장애인 여자를 보게 되었을 때 ‘덮치게’ 되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남자의 사랑은 다 그렇게, 강간처럼, 일종의 폭력으로 온다? 가부장제 이성애주의 사회가 사랑과 폭력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들수록 오히려 요청되는 것은 더 촘촘한, 더 다양한, 더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저 뻔한 개연성에의 유혹에서 벗어나, 저 흔한 ‘남자의 사랑은 이러쿵저러쿵, 여자의 사랑은 그러니까 말이지’하는 낡은 신화를 뒤로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일이다.

관객들의 쾌락적 시선 앞에 노출된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의 몹시 심하게 뒤틀리는 신체는 그 자체로서 영화의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와 무관하게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겨진다. 여자의 판타지가 보여주듯 그녀의 뒤틀린 신체는 결함이고 결핍이다. 그리고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관객들은 부담없이 웃고 울고 즐긴다. 여기에 영화 <오아시스>의 사막이 있다.

<오아시스>는 좋은 의미에서, 리얼리즘적 맥락에서 문제적 영화다. 거기에는 오아시스와 사막이 동시에 있다. 장애인 문제 일반,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서서히 망각과 은폐의 사막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문화적 재현과 현실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무시한 채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이야기’에 도취해 버린다면 모처럼 만나본 의미심장한 영화의 그 의미층들을 단순화시켜 버리는 ‘명백히 부도덕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리라.

김영옥 /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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