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민족주의 논의의 대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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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페미니스트는 민족주의를 생각하는가? 우리 땅에서도 이처럼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적지 않다. 민족주의가 가부장적 관행과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아닐까. 성균관대 사학과 정현백 교수는 지난 15일 역사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역사학 국제회의에서 발표한『아시아의 관점에서 본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유사성과 차이』라는 논문을 통해, ‘왜 페미니스트는 부정적인 기능을 하기가 십상인 민족주의를 끌어안고 고심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분단의 비극적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그가 발표한 논문을 요약 설명해 봤다. <편집자 주>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를 밝힐 때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무언가.

정 교수는 역사성의 결여와 공간적 조건에 대한 몰이해라고 단언한다. 중심부 국가에서 진행되는 학문적 논의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면, 이들보다 부분에 따라서는 반세기 혹은 한 세기가 뒤쳐져 있는 우리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그 이론의 창안자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 출신이어서, 북미나 유럽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지니는 일반적인 부정적인 함의-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란 곧잘 인종차별주의나 제국주의와 연결된다-들이 그대로 전달돼 왔다. 따라서 정 교수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를 논하려면 우리가 지닌 역사성과 공간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은 기본 대 전제”라고 지적한다.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한 한국의 초기 페미니즘

정 교수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민족주의가 상상된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과연 그렇다면 ‘여성은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고 화두를 던진다. 이는 각 국가가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 여성 노동의 성격, 정치적 조건 그리고 문화적 성향이라는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결정과정 속에서 결정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국의 초기 페미니즘은 빈곤 극복과 민족해방의 과제라는 시급한 현안에 주력하는 이른바 총체적인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통합의 일부였다. 1924년에 출범한 여성동우회를 중심으로 경성여자청년동맹, 중앙청년여자동맹, 근우회가 연이어 만들어진 데서 그 기류를 읽을 수 있다. 사회주의와 페미니즘과의 결합은 여성 전체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으나 민족의 전통문화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못했기에 여성의 전통적 복종이 그대로 유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숙제인 것이다. 그 이후 일본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도 등장했지만 경제적 자립 조건을 갖추지 못해 민족주의 운동에 속한 여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역사적 맥락에서의 군 위안부 문제

정 교수는 최근 한국 여성학계에서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한국의 진보적 여성운동이 민족주의 언설에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 글에서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결별을 요구하는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 교수와 일본의 페미니스트 이론가 우에노 치즈코의 사례로 제시된다. 김은실 교수는 군 위안부 문제에서 위안부들의 목소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데서 비판의 근거를 내밀었다. 우에노 치즈코는 한국의 여성운동이 이 문제에서 강제·자발의 여부에 따라 여성을 창부 대 순결한 여성으로 분리, 기존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두 사람의 비판이 군 위안부 문제 자체가 지닌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했고 일본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문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즉 일본의 군 위안소 정책은 식민지 여성을 강제 동원해 성 노예로 활용한 국가정책이었으며 700만이 넘는 일본군의 성적인 충족을 위해서는 식민지 여성의 동원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군 위안부에 대한 성폭력은 제국주의와 식민지간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치즈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스즈키 유코는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은 근대에 만들어진 남성·여성 이분법 해체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이 범주를 만들어낸 권력 구조에 무관심함으로써 가해와 피해의 문제점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저항세력이 만들어내는 민중민족주의 역시 민족주의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데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여성이 민족 국가의 틀 내에서 결정되는 한 주체적으로 민족주의를 만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 민족주의 운동으로 여성 지위 향상

이 글에서 제 3세계·식민지 국가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함께 전통적인 봉건군주·가부장제에 투쟁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성해방 투쟁은 민족해방 운동의 일부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근대화된 국가이미지를 세우기 위한 요소로 여성의 서구화가 요청됐기 때문에 신 민족주의 운동은 여성에게 가해졌던 전통적인 억압을 타파하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그 예로 인도의 과부 화형, 베일, 다처제, 중국의 전족 등이 파기된 사례를 제시했다.

19세기 인도에서는 ‘신여성’이 민족주의 담론의 중심 이슈였으며 여성은 인도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정신적 영역의 수호자로 간주됐다. 여기서 여성들이 새로이 획득한 자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성과 모성이 결합된 신여성의 개념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고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어머니라는 신성한 이미지는 민족감정을 고양시켰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민족과 결합, 남성들의 겪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서구 페미니즘이 빠진 딜레마

정 교수는 유럽의 페미니즘은 민족주의에 설득됐던 여성들에게서 격리된 반면 민족국가의 틀 내에서 여성의 삶과 지위는 지속적으로 개선됐다는 점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언급했다. 민족국가의 독립이 지연됐던 유럽의 주변 국가로 시야를 돌리면 이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 발견된다.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은 민족자치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서 후원자로서의 여성을 필요로 했으며 봉건적 장애물이 적은 관계로 여성의 선거권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주어졌다. 결국 이들 나라에서 민족주의는 도덕개혁 운동과 여성참정권을 결합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조혜원 기자nanca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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