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80년대의 민중가요‘직녀에게’는 이런 노랫말로 시작된다. 올해 8·15 광복절은 칠월칠석이기도 하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이날을 기해 남과 북이 서울에서 만났기에 ‘직녀에게’라는 이 민중가요의 노랫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1백여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온 북한과 1년여의 준비 끝에 만나는 자리다. 그것도 남과 북 모두 안팎의 여러 어려운 상황들을 헤치며 참으로 힘겹게 마련한 자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만남의 감격은 워커힐호텔 공간 안으로 갇히고 말았다. 의미도 그 공간만큼으로 쪼그라드는게 아닌가 싶은 우울한 전망이 앞선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정치인들이 이런 만남조차 정치적 의미를 붙이며 폄하하려 드는 현실이 이런 전망을 낳게 한다. 날이면 날마다 서로에게 상처내기,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판과 그 정치판 동정에만 눈을 팔고 있는 이 나라 주류언론들의 소아병적, 근시안적 민족관 내지는 역사관이 그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서해교전은 문제삼으면서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지 그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이 만나기로 한 시점에 고작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하면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울려퍼질 것을 염려하는 이 나라의 주류언론이 과연 지성은 고사하고 이성을 갖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유엔에 가입한 엄연한 국제사회의 1국가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데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연주되는 건 상식이 아닌가. 게다가 1백명 규모의 응원단도 보낼 것이라니 인공기 흔들며 응원한다 해도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어느 나라에 이 지경의 언론이 있을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대내외적으로 사면초가 상태인 정부가 주눅이 든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위기에 위축된 정부의 처지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냉담한 여론에 혹여 극우세력들의 난동으로 인한 불상사라도 생길까 싶은 염려를 이해한다쳐도 그 정도가 지나치다. 북한의 대표적 예술인들이 공연할 무대가 좁은 공간으로 바뀌고 관람 인원도 당초보다 대폭 축소됨에 따라 일주일전부터 참관신청을 하고 참관인단에 뽑혔다며 기대에 차 있던 몇천명의 참관인단은 머쓱해졌다.

이번 남북간 만남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경색됐던 정부간 관계 개선의 물꼬가 트였다. 준비회의차 평양에 다녀온 한 인사는 남한에서 간 인사들이 권하고 설득하는 바를 거의 수정없이 수용하는 북한측 반응에 오히려 놀랐다고 털어놨다. 남측 인사들이 권고한지 하루만에 서해교전에 대해 사과성명을 낸 것과 장관급 회담을 제의한 것은 바로 그런 북한의 적극적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측은 아직 마음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다. 서해교전이 상황을 매우 경색시킨 것은 명백하지만 그 일이 있기 이전에 북한도 시기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있다. 좀 더 일찍 남북관계 진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처지에 이르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막바지에 몰려서야 적극성을 보이며 나서는 북측의 태도가 안타까운 대목이다.

과정과 이유야 어떻든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선택의 키는 남한측으로 넘겨졌다. 이 상황에서 고작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북측을 워커힐로 몰아넣고 단지 남한땅에서 치러진다는 이유만으로 아시안게임과 같은 국제경기에서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에 딴지 걸고 나온다면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역사는 뭐라 기록할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을 가리고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가릴줄만 알아도 일단 어른이 된 징표로는 넉넉하다. 우린 지금 과연 어른다운가.

다시 한번 ‘직녀에게’로 돌아가 그 노랫말의 마지막 구절을 읊조려본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편집주간 shh@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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