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

오프 브로드웨이 1인 뮤지컬에서 영화로 변신한 <헤드윅>은 강렬하고 지적이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재미와 위트가 출렁인다. 영화가 진행되는 95분 동안 관객들은 헤드윅의 정체성 탐구 여행에 동참하며 허기가 지도록 웃는다. 그리고 그 허기진 배로 '이 영화의 재미가 낳은 또 다른 실천적 효과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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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랙 퀸 록 가수 헤드윅은 미국 중서부의 평범한 식당에서 전혀 '의식화'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접시 위로 자신의 다리 사이에 거북살스럽게 붙어있는 '1인치 살덩이의 역사'를 분노하며 발광하듯 날려보낸다. 영화 내내 헤드윅과 '그녀'의 밴드 '더 앵그리 인치'가 수행적으로 들려주는 노래는 한젤이라는 소년에서 헤드윅이라는 트랜스젠더로 변한 한 사람의 개인사를 선회한다. 미국 GI와 독일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서방의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동독에서 자란 소년 한젤. 오븐에 몸을 구겨넣은 채 데이빗 보위의 음악을 들으며 자유세계에서 로커가 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첫 유혹은 서독에서 만들어진 젤리의 세련된 맛, 미국 흑인병사의 손에 들려있던 그 '권력의 맛'이었다. 그리고 유혹은 언제나 그 다음 유혹을 낳는 법. 자유의 땅 미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흑인병사의 제안대로 수술대에 오르지만 마취에서 깨어난 한젤이 자신의 몸에서 발견한 것은 가슴과 질이 아니라 제대로 제거되기 않아 아리송하게 남아있는 1인치의 페니스였을 뿐이다. 이제부터 금발, 짙은 화장, 의상 등 강한 인위성으로 치장한 로커 헤드윅이 무대에서 벌이는 모든 퍼포먼스는 '한 사람의 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거기에 가담하는 권력의 양상은 어떠한가'를 그야말로 수행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의 연속이 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예술의 기능에 대해 '오락이냐 교육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상호보완적인, 예술향유에 있어 근본적으로 필연적인 이 둘을 다 얻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거의 양다리 걸치기의 부도덕성을 연상시킬 만큼 현실세계가 제공하는 문화 텍스트들은 대부분 일방적이고 빈곤하다. 그러나 <헤드윅>은 지구적 소비상품문화 시대에 오락과 교육 사이에서 긴장감 넘치는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문화'상품'의 한 흥미로운 현장이 되고 있다. 영화는 성전환 수술의 '전'과 '후'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성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허구를 벗겨내고 그 구성적 성격과 정치적 성격을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급진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을 무엇보다도 음악의 수행적 실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다 빨려 들어가지 않는 예술의 자율적 영역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가슴과 질은 없이 페니스의 어렴풋한 흔적만 가지고 있는 어떤 몸에 대해, 기존의 성기 중심적 성별인식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몸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어떤 성별적 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할 것인가. 심지어 어떤 사랑의 포즈를 상상해 볼 것인가. '내 몸은 온갖 권력의 가위질이 만들어 놓은 몽타주'라는 헤드윅의 분노는 그러나 특히 상품 물신적 대상으로 선택돼(!) 온갖 책략과 복잡한 가능성/불가능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는 여성의 몸에서 더 큰 아우성으로 울려나오는 것은 아닐까.

김영옥 /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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