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먹어도 난 왜 배가 고픈지 모르겠어.”

이 말은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 거스 히딩크의 말이 아니다. 지난 80년대 신인 복서로서는 최단시간에 한국 챔피언, 동양 챔피언에 올라 한국 권투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김득구 선수의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4라운드 동안 죽도록 맞은 값으로 고기 턱을 내자 그것도 마음놓고 먹지 못하던 후배의 쓰라린 고백이다.

@17-1.jpg

극장가에서 6월은 성수기다. 그러나 국민의 신화를 만들어낸 월드컵 덕(?)에 영화계는 물론 연극계도 찬바람을 맞았다. 다음 공연작품을 의논하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한 동료가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을 화제로 올렸다. 그 자리에 있던 20대 30대 초반들은 그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던 홍수환 선수는 그의 일화를 패러디한 코미디 덕분인지 기억하는 이가 몇 있었다.

허기진 배의 배고픔처럼 흔들렸던 초라한 흑백시대에 홍수환 선수의 세계챔피언 타이틀 장면은 1970년대 대한민국의 화려한 승리였다.

그의 7전8기 신화는 8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이룩한 희망의 서곡과도 같았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의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섰던 그는 그가 이룬 승리의 불꽃만큼 실패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사람들은 그저 그가 이룬 승리의 샴페인만을 원했고 승리하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득구 선수, 라이트급의 작은 체구, 부모의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권투였다. 수없이 샌드백을 치며 찢긴 데를 또 맞아야 하는 육체의 고통, 그것을 극복하고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코앞에 둔 채 맨시니가 날린 한방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김득구.

그러나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불행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장기를 병원에 기증한 어머니는 주위의 비난과 자책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만다.

단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선택한 두 사람, 두 삶의 명암은 권투라는 운명 앞에 각기 다른 빛깔로 명멸하고 말았다. 진정한 챔피언의 의미는 무엇일까? 월드컵으로 국민의 영웅이 된 거스 히딩크는 자신을 영웅으로 보지 말기를 당부하며 당당한 뒷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영웅의 앞과 뒤를 너무도 잘 아는 듯한 영리한 그다.

승리의 축포만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챔피언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설까.

‘먹이를 찾은 맹수처럼 달려드는 도전자가 저기 서 있다. 나를 밟아야만 한다는 도전자의 절박한 눈빛, 그 뒤로 보이는 손가락질하며 야유하는 관중들, 그들의 차가운 눈빛. 그래 난 챔피언을 향해 달릴 때부터 이런 허무함을 느꼈었다. 예상했던 바… 이제 떠날 때가 온 것일까? 아, 아버지가 보고싶다.’ (홍수환, 그의 독백 중)

윤혜숙 /극단 ‘꿈을만드는사람들’ 기획실장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