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 말을 안 믿어주니깐 나도 이제 엄마 말 안 믿을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쏘아보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서 있는 여덟 살짜리 남자 아이. 내 아들이다. 조금 전 놀이터에서 어떤 형아가 목을 잡아당겼다며 울고 들어왔길래 나가서 알아보니 다른 애가 가지고 노는 휴대폰 장난감을 아들이 만져 보려다 생긴 말썽이었다. 그 4학년 짜리 아이는 팔을 잡았지 목을 잡지는 않았다고 했다. 아이의 예의바른 말투에 ‘아이들 놀이’에 어른이 끼어든 것 같아 영 체면이 서지 않았고 기어이 목을 잡혔다고 우기는 아들을 나무라며 집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사소한 거짓말을 하면 더 큰 신뢰를 잃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고 “엄만 네 말을 믿을 수가 없어” 한 것인데 그런 내 의도를 알 길 없는 아들은 당장에 분하고 서운한 마음이 앞섰던 모양이다. 아들을 다그치려던 마음을 접고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말의 속내를 파악해서 깨닫기보단 그대로 받아들여 상처를 먼저 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른 아이의 주먹 쥔 손을 끌어쥐고 “재영아, 미안해. 엄마가 정말 너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말았으면 해서 그랬어” 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곧바로 “엄마는 야단치니깐 내가 거짓말하는 거지” 한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마음속에 불신의 싹이 자라도록 행동했었나 하는 반성이 자리한다. 그렇지만 ‘가끔 거짓말도 하고 때론 타협도 하면서 영악하게 세상을 살아가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비록 세상은 크고 작은 거짓말들 투성이고 어른이 될수록 불신의 골이 더 깊어만 갈지라도 내 아이에게는 ‘불리하더라도, 매를 맞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싶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벚나무를 도끼로 찍어낸 조지 워싱턴의 일화를 들려주며 ‘정직’은 ‘양심을 속이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작은 약속이며 이런 작은 약속들을 실천하는 사람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럼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야? 조지 워싱턴은 거짓말 안해서 대통령이 된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답변이 궁색해진다. 그러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났다. 하와이에서 고교를 다니는 한국인 학생이 수학경시대회에 참여해 1등을 차지했으나 채점 결과를 확인하다 오답이 정답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했다.

이미 두 명의 채점관이 재확인까지 마친 상태여서 시상식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수상자인 당사자는 잘못을 바로잡고 재채점을 통해 결국 1위에서 3위로 밀려났다. 그 학생은 1위의 영광을 버린 대신 ‘양심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용기있는 학생으로 현지 언론의 극찬을 받았고 하와이 주지사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는 얘기를 들려주면서 ‘정직’이 삶의 얼마나 큰 가치인지 설명해 주었다. ‘정직한 세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예가 있는 것이 내심 감사하기까지 하다. 대충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과연 ‘정치인=훌륭한 사람=정직한 사람’이라고 힘줘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의문이 앞선다.

김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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