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시대 최고의 여창이었다
그는 우리시대 최고의 여창이었다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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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문화연구회, 명창 박록주 기리는 작업 활발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박록주·허금파·강소춘·이화중선 등 여창이 다수 등장하게 됐고 이런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판소리는 여성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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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여성국악 동호회를 결성하는 등 여성국악인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섰던 판소리계의 거장 박록주.



그러나 상처투성이었던 판소리의 원형을 되살리고자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고 1948년 당시 창극단체가 여성을 푸대접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30여명의 여류명창을 규합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던 이가 바로 판소리계의 거장 박록주 명창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이 시대의 뒤안길에 묻혀 그의 이름마저 점점 퇴색돼 그 존재가치가 불투명해질 즈음 구미문화연구회에서는 박록주 명창을 발굴해 재조명하고 있다. 명창 박록주 추모기념사업회(회장 김영일)를 발족해 박록주 명창의 소리를 보존하고 업적을 기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은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해방 후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해 현대 판소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동편제의 기둥으로,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 현대 판소리와 창극 및 판소리 교육과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록주 명창의 삶과 예술활동을 길이 보존하고자 하는 일이다.



1905넌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박록주의 본명은 명이(命伊), 아호는 춘미(春眉)로 록주(錄珠)는 그의 부친이 지어준 예명이다.



박록주가 12세 되던 해 고종(1902년)때 김창환에 의해 만들어진 협률사가 전국 순회공연으로 선산에 들렀을 때 박록주의 부친은 딸을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 동편제의 대가인 박기홍(당시 고종에게 판소리의 대가로 인정받아 참봉의 직계를 받음)에게 보냈다. 두 달 동안 <춘향가> 전 바탕과 <심청가> 일부를 배워 동편제 소리의 꿋꿋하고 정갈한 소리의 기틀을 닦았다.



14살 되던 해 다시 선산을 찾은 협률사 공연을 부친과 함께 본 박록주는 서편제의 대명창 김창환을 두번째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협률사를 따라다니며 소리공부를 하게 되고 이때 ‘제비노정기’를 배운 박록주를 통해 현대의 많은 명창들이 제비노정기를 부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박록주는 또 다시 대구에 사는 강창호를 세 번째 스승으로 모시면서 <심청가>의 처음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까지와 수궁가의 ‘고고천변’을 배웠다.



17세에 원산의 명창대회에서 첫 남편 남백우와 결혼한 후 동편제 명창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사랑가-십장가’까지 배웠다.



박록주는 우미관에서 열렸던 명창대회에 참가하면서 서울에서 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25세 때 박록주는 복잡한 가정관계와 고난에 찬 인생을 비관해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남백우와 헤어진 박록주는 1931년 김종익과 재혼했고 김종익은 박록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 사무실의 건물을 사줬다. 1934년에 만들어진 조선성악연구회는 판소리 다섯 명창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음률협회의 후신이다.



박록주는 조선음률협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연을 했고 1930∼40년대의 판소리 공연에서 명성을 날렸다.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창립되면서 창극공연에 나서 <춘향전>의 춘향, <심청전>의 심청, <흥보전>의 흥보처, <숙영낭자전>에서 숙영낭자 등 주연을 맡으며 창극배우로도 명성을 얻었다.



해방이후 여성국악동호회와 국극사를 조직해 <열녀화> <햇님과 달님> <월화궁의 비화> 등에 출연과 안무를 맡았다.



1943년 39살에 박록주는 조선성악연구회 이후의 국악계가 남자들 위주로 움직여지는데 불만을 갖고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다.



46살에 한쪽 눈을 실명한 박록주는 검은 안경을 쓰고 다니며 음반 취입을 하고 100여 차례 국악방송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다가 19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판소리보존회를 설립하고 판소리유파발표회를 연 것은 창극으로 인해 훼손된 판소리의 본질을 되찾고 창극무대의 화려함보다는 판소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 김소희, 박귀희, 조상현, 한농선, 성창순 등 다음 세대의 판소리를 이끌어갈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동편제와 서편제란



동편제(東便制)는 운봉. 구례. 순창. 홍덕 등지에서 이어져 왔다.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으로 활달하고 우렁차며 강렬하다. 이와 같은 흐름으로 노래한 유파가 동편제다. 판소리에서 동편제는 발성의 시작이 신중하며 귀절의 끝마침이 쇠망치로 끊듯이 명확하고 상쾌하며 계면조 가락을 많이 장식하지 않는다.



서편제(西便制)는 철종 때의 명창인 박유전에 의해 창시된 판소리 양대 산맥의 하나로 광주 .나주. 보성. 강진. 해남 등지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이 지역이 전라도 서쪽에 있다 하여 서편제라 일컬는다. 서편제의 특징은 동편제와 대조적으로 가창의 성색(聲色)이 부드러우며 구성지고 애절한 느낌을 준다. 노래 소리의 끝도 길게 이어진다. 부침새의 기교가 많고 계면조를 장식해 정교하게 부른다.



경북 권은주 주재기자 ejs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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