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과 여성부 위민넷이 함께 하는 내삶의 멘토 찾기 ③ ]

정신과 의사란 어떤 존재인가. 자신 스스로 부대끼고 갈등을 느끼면서도 마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님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 환자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어찌보면 우리 삶에서 찾고자 하는 멘토도 바로 그런 품성을 갖춘 소유자일런지 모른다. 이번에 만난 ‘내 삶의 멘토 찾기’, 그 두 번째 주자는 정신과 전문의인 정혜신씨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보다 더 남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성심리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붙게 된 그녀에게 여성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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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네요. 이제껏 제 마음 속에는 닮고 싶은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여자 선배를 떠올려 달라는 주문에 정혜신 원장은 한참을 고민하다 미안한 듯 이렇게 첫 말문을 열었다. 정 원장은 무엇보다 그 연유를 어린시절의 기억에서 찾았다.

7살 되던 해 암 선고를 받은 어머니의 7년이라는 긴 투병생활, 그리고 임종을 지켜보면서 막연한 우울증세와 무기력감에 시달렸던 그녀로선 적극적으로 모델링을 하고 싶은 대상으로서의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가슴 아픈 언저리에는 병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꿈도 희망도 버린채 오로지 가장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기억만 선연히 남아 있던 터이다. 사실 그녀가 남자들의 심리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런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가치 유보해선 안돼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제 고백인데요, 저는 의대시절 여학생 휴게실은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여자란 대화가 안되는 한심한 수준의 멘탈리티를 갖는 인간, 표피적인 인간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시절 여자 친구들의 눈을 쳐다보질 못했어요.” 정 원장은 정상적인 또래가 경험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의 개인적 삶에 대한 무기력이 결합하면서 그간 참 많이도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워왔다고 고백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친구들의 대화 내용이나 태도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가치를 유보하거나 그것이 속마음을 가리는 수단으로 활용돼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당시 그녀가 바라본 친구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공격적으로 일했고 남자만을 선배로 여기며 따랐다. 하지만 여성들의 일상적인 관계나 생활은 철저히 차단하는 그녀에게도 주머니에는 항상 거울을 들고 다녔을 만큼 이중성이 존재했다는 고백이다. 심리적으로는 그녀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내 안의 여성성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정 원장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다 확연히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정신과 의사가 겪는 통과의례가 그렇듯 스승에게 심리분석을 받는 과정에서 얻게 된 자연스런 결론 덕분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여자답다'는 말을 듣고 산다고 웃는다. 그것이 나쁘지 않단다.

“지금 제가 여자라는 게 편안합니다. 다만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근원적인 이슈니까 인간이라는 정체성,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요.”

내 안의 가치를 느끼게 해 준 최초의 사람

“심정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내 의지나 마음을 알아준 고마운 선배였어요. 정신과에 대한 열의와 제 안에 깃든 가치를 스스로 느끼게 해 준 최초의 사람이었지요.” 정 원장이 삶의 기로에 섰던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다가온 선배는 다름아닌 남자선배였다. 지금은 아주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매년 단 1명의 여성에게만 레지던트가 할당됐던 의대의 기존 관행을 깨고 시험 성적으로 남녀 공히 레지던트를 가리게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선배다. 그래서 정 원장은 여자 동기 12명 가운데 3 명의 여자 레지던트로 발탁된 예외적인 학번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처럼 같은 길을 앞서간 여자 선배를 만나기 어려웠던 상황도 그에게 여자 멘토를 갖지 못하게 만든 원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자 후배들에게 자신은 어떤 선배냐고 물었다.

“숙연해지네요. 관계에 익숙치 못한 늘 야속한 선배, 아쉬운 선배였지요.”

그러나 정 원장은 진료를 통해서건, 관련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서건 많은 선후배간의 만남이 존재한다. 어찌보면 그녀야말로 많은 사람에게 정신적인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는 진정한 의미의 '멘토'일는지도 모른다. 그를 따르는 여자 후배들도 제법 많다.

자기 스스로 세상을 보는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우리들 여성은 자신의 문제를 끊임없이 하찮게 여기는 우를 범한다. 모든 일의 주체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정혜신, 그러나 여성 멘토를 찾아내지 못하는 그녀를 만나면서 든 생각이다.

김경혜 기자 musou21@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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