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사무국장

지난달 12일 KBS <열린채널>의 시청자프로그램운영협의회는 진보네트워크 참세상이 제작하고 서울영상집단의 이마리오 감독이 연출한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에 대해서 편성불가 결정을 내렸다.

편성불가 이전부터 운영협의회는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검열을 시도해왔다. 진보넷과 이마리오 감독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대표적인 요구 두 가지는 ‘~찢어라’라는 제목을 순화하고 박정희 생가 장면을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작품 제목은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그 안에 녹아 들어간 상징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이다. 더구나 더욱 노골적인 제목이 영화나 방송에서 다반사로 쓰이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운영협의회의 이런 요구는 억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한 박정희 생가 장면은 주민등록증과 지문날인 제도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도입됐는가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면인 바 이를 삭제하라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열린채널>은 국민들이 직접 제작, 참여함으로써 기존 공중파에서 다루지 못했던 다양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퍼블릭 액세스 채널이다. 따라서 운영협의회는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오히려 운영협의회가 검열기관으로, 또 국민 위에선 권력기구로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박정희 정권이 간첩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1968년에 도입한 지문날인 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렇게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파시즘의 잔재를 폭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운영협의회 위원들은 자신들을 향한 이런 비판이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한 전문가는 주민등록제도가 남아있는 한 우리 국민에게 프라이버시권은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어느 국가나 주민에 대한 정보를 일정 정도 수집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다양한 정보(예컨대 주민등록 의료 운전면허 병역 등)가 주민등록번호라는 유일한 열쇠로 통합될 수 있고 열손가락 지문날인을 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사실상 지문날인 제도는 국민통제를 위한 것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다. 범죄현장에서 수집한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한 경우는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망자 확인을 위해서도 지문이 아닌 치열구조나 유전자 감식 등 다른 방법이 쓰이고 있다. 몇년전 일본에서 재일 외국인에게만 지문날인을 요구해 대대적으로 반발한 적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작 모든 국민에게 지문날인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가 뭘까.

한편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또 한편에서는 프라이버시의 침해로 드러나고 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국민들을 통제하고 그 통제에 스스로 익숙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파시즘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