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스타, 반(反)포르노 운동가 그리고 가정폭력의 희생자

유학생활을 하다보면 한국에서는 건성으로 읽던 신문도 일부러 인터넷을 통해 샅샅이 읽게된다. 가끔은 똑같은 주제의 기사라도 한국 신문과 영국 신문이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세계 최초의 포르노 스타 린다 보먼의 죽음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언론은 곁가지 기사로 그의 죽음을 다루었다. 1972년 제작된 포르노의 고전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에서 린다 러브레이스로 출연하다가 80년대에는 180도 변신해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포르노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53세에 죽었다는 단순한 눈요깃거리 기사였다.

영국 주요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은 지난달 25일 극에서 극으로의 삶을 살았던 린다 보먼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기사의 요지는 그의 삶을 단순하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목구멍 깊숙이’는 린다를 성매매 여성에서 세계 최초의 포르노 스타로 세상에 화려하게 데뷔시켰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성애장면으로 린다는 뭇남성들에게 섹스 심벌이 됐고 몇몇 여성운동가들에게는 여성도 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모델로 환영받았다. 토크쇼에 출연하고 그의 이름으로 성인용품이 출시되고 플레이보이 지에 등장하고 책까지 집필하게 됐다. 언론 대중 포르노 산업전체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 린다는 ‘고난(Ordeal)’이라는 자서전에서 자신은 섹스광도 아니며 포르노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돈이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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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고난'

영화 흥행 후 뒤따랐던 연예활동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목구멍 깊숙이’가 대성공해 돈을 많이 벌여들였지만 자신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린다의 첫남편이자 매니저였던 척 트레이노가 총과 폭력으로 위협하며 포르노 출연 및 성매매를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자서전 출간 이후 그는 반포르노 운동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미국 각지를 떠돌며 반포르노 운동의 중요성을 연설하고 의회가 포르노 산업에 대한 조사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연설·글쓰기·홍보영화 출연 등의 활동은 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반포르노 운동가, 여성학자들은 그의 삶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포르노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총부리 밑과 같은 억압 속에서 영화를 만들고 성매매를 하며 불행한 인생을 산다고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린다는 포르노 업계에서 그리고 반포르노 운동계에서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 됐다.

이 와중에 그의 목소리를 진실로 경청했던 그룹은 어디에도 없었다. 린다 자서전의 주제는 섹스, 포르노산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가정폭력의 위험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매맞고 고통받는 아내로서의 린다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성산업 종사자들 역시 그들의 직업이 사회에서의 역할을 모두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의 아내, 누나, 엄마로서의 역할도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간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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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다보린이 출연한 영화 '목구멍 깊숙히'의 사진

린다 보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린다는 당시 사람들이 가정폭력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을 때 그에 관한 충격적인 책을 펴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가 많았을 지옥 같은 결혼생활에서 탈출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관계를 유지한 생존자였다는 점이다. 린다의 두 번째 남편인 래리 마키아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나와 아이들에게는 좋은 엄마와 린다일 뿐”이라며 “5년전 그와 22년 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했지만 이혼한 이후에도 그는 가장 좋은 친구였다”고 말했다.

이주영/ 영국 통신원에섹스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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