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일체의 타협 없이 잔혹의 미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개발도상국가의 악몽’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제국의 신자유주의 논리에 덜미가 잡힌 한국사회를 법, 혹은 정의, 그리고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해부하고 있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시작해 보자. 신의 손(물론 신은 없다!)에서 복수의 칼을 빼앗아 묵묵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수의 정신이 가리키는 길을 걸어가던 동진의 가슴에 날카롭고 짧은 단도가 판결문 한 장을 꽂아 놓는다. 죽어가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던겨진 수수께끼. 이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누구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 전체를 부조리극의 아우라로 마무리짓는 이 마지막 장면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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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의 실수처럼 문득 나타나 제의적 춤을 추듯 동진의 몸에 차례로 칼을 꽂는 4명의 남자들은 요세프 K.의 몸에 칼을 꽂는 <심판>(카프카)의 사형집행인들을 닮아있다. 또한 동진의 가슴에 꽂힌 판결문, 그의 죽음의 유일한 의미이자 해석인 이 문자는 죄수의 몸에 죄명을 새겨넣음으로써 천천히 사형집행을 완결시키는 <유형지에서>의 죄인의 몸에 새겨진 문자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유형지에서>처럼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니 죽어가는 바로 그 과정이 그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죽음이 완결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죄명의 의미를 완성시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혹시 음모가 아닐까? 이렇게 질문하듯 영화의 종결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사라지지 않는 동진의 웅얼거림. 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의혹으로 가득한 이 웅얼거림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관객의 어깨를 낚아채며 느닷없이 으스스 소름이 돋게 만든다.

복수는 ‘류’의 것이었고 ‘동진’의 것이었지만 그 둘이 서로의 꼬리를 맞물어 온전한 복수의 원을 그렸을 때, 복수의 칼은 더 이상 그들의 손에 있지 않았다. 복수의 칼날을 그토록 깊숙이 타인의 살 속에 들이박았던 두 남자의 자기 이해는 모두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사람이었습니다’이다.

신장수술을 받아야 하는 누나를 위해 중소기업 사장의 딸을 유괴해야 했던 류의 ‘침묵 속에 갇힌 비극’은 고졸의 전기기술자로 창업을 시작해 미친 듯이 일만 해 오다가 이제 딸까지 잃게 된 동진의 ‘건조한 비극’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나래이션이 진행될수록 관객을 미궁의 긴장 속에 몰아넣는 것은 이들의 비극을 사실상 관통하고 있는 제국적 자본주의의 ‘법’과 ‘폭력’, 그 알 수 없는 신화적 힘이다. ‘착함’이나 성실이 개인의 정의감과 일상의 행복을 전혀 보장해주지 못할 때, 아니 오히려 무차별한 배신의 폭력으로 보답될 때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세 종류의 법/폭력의 착종상태를 폭로하고 있다.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을 얻고자 하는 노동자를 폐기 처분시키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전반적인 폭력 내에서,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일체의 경외감이나 존중감을 비웃으며 횡행하는 음험하고 비열한 사기행각의 그물망 내에서 류나 동진이 선택하는 사적 정의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미 제국의 신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의 서툰 저항이 그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멍청하게 팔짱을 끼고 어기적거리는 무기력한 경찰의 공법이 덧붙여진다.

영화는 이 모든 법의 유형이 다 실패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동진의 가슴에 남겨진 마지막 판결문은 자본의 위력만이 유일한 ‘정의’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망령의 그림자로 떠도는 ‘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본의 이 신화적 폭력에 맞설 수 있는 정의로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복수는 나의 것>이 남긴 화두이다.

김영옥/ 이화여대 여성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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