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3주기 맞아 여성투쟁사 재조명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자기의 조국을 위해 정열을 발산하고 독립을 외쳤다는 단순한 죄목으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을 받았으며 또 고문을 당했다. 어린 소녀들은 고꾸라지고 잔혹하게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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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윙(Edward W. Twing)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20여 명의 여학생들이 조용히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덮치더니 그들을 총으로 야만스럽게 구타하고 모욕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박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어린 소녀들은 머리채를 휘어 잡혀 집에서 끌려나와 전신주에 묶인 채로 대중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다. 아낙네들은 폭행을 당하고 비인도적인 악형을 당했다.” (<한국독립운동의 진상> C. W. 켄달 기록)

일본헌병의 총칼 앞에서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지속적인 평화투쟁을 전개했던 1919년의 만세운동.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외국 언론들은 거의 모두 ‘조선 여성들의 투쟁’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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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일제가 여성들을 수감하고 고문하기 위해 신축한 여성옥사(지하감방)를 복원해놓았는데 허리를 펼 수도 없는 1평도 채 안 되는 독감방 4개가 붙어있다. 이 곳이 바로 유관순이 온갖 고문과 악형으로 순국한 곳으로, ‘유관순굴’이라 불린다. <사진·민원기 기자>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전국 각지에서 여학생들과 기생들을 비롯한 여성들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는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세를 외친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하고, 끌려가 나체로 모진 고문과 능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성들은 밖으로 뛰쳐나왔으며 수많은 비밀모임을 조직했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어쩌면 더욱 놀라운 일은 2002년 3·1운동 83주기를 맞이하는 우리들 중에 당시 한국여성들의 투쟁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드물다는 사실일 것이다. 김마리아, 유관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후세의 역사는 이들을 마치 소수의 앞서나간 여성 정도로 가르쳐왔다. 여성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기록들은 주로 외국인들에 의해 집필된 것들이며 신문상의 기록만 보더라도 여성들의 만세운동은 훗날 3·1운동을 기록한 역사서들의 통계와 비교했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83년 전. 평소 거리에서 여성들의 모습을 볼 기회도 거의 없었고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조를 지키는 것’과 ‘순종’이라는 통념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한국여성들이 자유와 정의를 찾기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묻혀버린 여성들의 역사를 우리에게로 다시 살려 내오자.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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