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에 맞선 시드디키 아프간 보건부장관

여기 탈레반과 맞선 여성이 있다. 그는 단 한번도 부르카(burka)를 쓰지 않았다. 남녀를 막론하고 탈레반에 정권에 정면으로 담판을 벌인 사람은 많지 않다. 탈레반이 물러났다. 이제 그는 과도정부의 보건부 장관이 되었다.

수하리히 시드디키는 망명한 자히르 샤(Zahir Shah)왕의 친척으로 파슈툰왕족의 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명망가의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나라로 망명해 편안한 삶을 누렸던 반면, 그는 소련침공과 내전으로 얼룩진 20여년의 세월을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어왔다. 특히 그는 의사로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1980년대 소련 침공 시 그는 매일 30∼50명의 부상병들을 돌봐야했고, 1990년대 게릴라전이 한창일 때는 하루에 300명의 희

생자들을 소화해야 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카불의 한 주부는 “수하리히는 우리 여성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딸만 여섯을 둔 수하리히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교육과 직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카불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유학, 복부외과 박사학위를 획득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탈레반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 그는 카불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군사병원(Four Hundred Bed Military Hospital)의 원장을 맡았고 아프간 의무군에서 여자로서 최고 높은 지위인 중령까지 지냈다.

1996년 탈레반은 정권을 획득하자마자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연히 여의사, 간호원들은 퇴직당해야 했다. 대신 탈레반은 극소수의 병원에 자기들을 따르는 남자의사들만을 고용했다. 이들 중에는 문맹인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병원은 환자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탈레반 법에 반한 사람들을 공공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수하리아 시드디키 역시 이 때 축출됐다. 그러나 그의 외과의사로서의 실력과 병원을 운영했던 능력은 탈레반 집권 하에서도 요구되었다. 탈레반 고위관리직의 부인이나 여성친척이 아프면 그를 찾아왔고 비공식적으로 그를 군사병원의 여성클리닉 국장으로 대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처음부터 자신은 어느 상황에서도 부르카를 쓰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탈레반 정권과 정면으로 담판을 벌였다. 결국 그의 완강한 고집을 탈레반도 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슬람 전통을 무조건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부르카 대신 차도르를 썼고 이슬람 전통을 인정하고 지키려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녀 모두 평등하다. 탈레반 정권은 전제정권이었고 그들은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허용하지 않은 큰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이방인들이었다.”라고 말했다.

시드디키는 과도정부에 권력을 꿈꾸는 정치인으로서 합류하기보다는 능력을 갖춘 전문인으로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장관직을 수락했다고 했다. 아프간의 여권신장과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할 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결코 여성이 약하지 않다.”

(자료: 2002년 1월 24일자 영국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

이주영 영국 통신원

abortion pill abortion pill abortion pill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