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성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26

피혐의자 측의 무고·명예훼손 등 맞고소 남발로 수많은 진실한 피해자들마저 불필요한 분란에 시달리게 되는 문제는 분명히 실재한다. 단지 한 두 건의 터무니없는 맞고소만으로도 숱한 피해자들을 위축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지금까지 대학을 포함한 일반 공공기관 내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조사담당자 또는 심의위원 등으로 여러 사건들을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동안 필자가 관여했던 사건들에서 아직까지는 피혐의자 측의 맞고소가 문제되었던 적은 없었다. 특히, 피혐의자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조사과정 등에 입회해 온 적도 많았지만, 이 경우에도 무고나 명예훼손 맞고소 카드를 피혐의자 측이 함부로 꺼내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뭘까? 사건진행 초기의 조사단계에서부터 사건처리의 주체인 기관 측에도 변호사가 참여하게 되면, 피혐의자 측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오건 무얼 하건 간에 ‘함부로 이것저것 막 던져보지는’ 못한다는 뜻일 거다.

이쪽 편에 변호사가 하나 앉아 있다고 해서 법적으로 저쪽 편이 고소를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변호사가, 있으나마나 보이지도 않게 꼭꼭 숨어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기관 측으로서도 ‘맞고소 준동’을 억지할 수 있는 모종의 ‘사실적인 압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꿔다놓은 보릿자루’일지언정 변호사는 이처럼 꽤나 쓸모가 있다.

기관 측에서 초기단계부터 조사 등을 주재하는 변호사를 참여시키는 것의 강점은 피혐의자 측에 대한 ‘사실적인 억지 효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법리적인 다툼과 불복의 소지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절차와 내용 모두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론적 제안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위와 같은 필자의 제안을 들은 대다수의 공공기관들은 대뜸 이렇게 반문할 것 같다. ‘변호사 참여 확대? 좋다! 근데 돈이 어딨나? 말은 좋지만, 우리는 돈이 없다! 돈이 없는데 대체 어쩌란 말이냐!’

 

변호사 입장에서도 난처한 점이 없지 않다. 필자는 공공기관들로부터 종종 자문요청이나 사건의 심의 참여 요청을 받곤 한다. 자문의 경우에는 어찌되었건 별 상관은 없지만, 심지어 차로 서너 시간을 달려가야만 하는 먼 곳에서 심의 참여를 요청해 오는 경우에는 거절하기도 승낙하기도 참 난감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하루를 꼬박 들여서 다녀오더라도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강의도 계속 맡고 있으니 좀 특수한 편이어서, 위와 같은 자문요청 그리고 1년에 적어도 몇 번 정도는 공익활동 차원에서라도 멀리 다녀와야 하는 사건처리 참여요청에 꼭 응해야 될는지는 혹시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독특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과연 어느 누가 위와 같은 요청에 흔쾌히 응하려 들까? 이런 식의 구조로는 결코 장기 지속적일 수 없다. 변호사 개개인의 선의와 호의에만 맡겨서는 지금과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각 기관들의 예산상황은 들쭉날쭉하다. 더구나, 적지 않은 경우에는 확보하고 있는 사건해결 관련 예산도 많지는 않을 것이니, 많은 공공기관들로서는 기관 내 자체해결 과정에 변호사 등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것을 처음부터 꺼리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현장의 여러 기관들에서 사건해결 의지 자체가 부족한 경우는 이제 생각만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엄정한 사건해결을 향한 의지는 있더라도 돈이 없어서 인적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기관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변호사 등 외부전문가를 참여시키고 싶어도 대체 누가 이 분야에 제대로 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지를 쉽사리 알기 어렵다는 정보접근 상의 난점도 해결되어야 마땅한 또 다른 문제다.

한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국가 차원의 ‘성희롱·성폭력 예방·대처 공공자문변호사단’의 구성과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형사절차에서 국선변호인 제도는 현재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고, 그 이외의 여러 법적 절차에서도 국선대리인 형태로 변호사 선임을 도와주는 제도는 점차 확산 추세에 있다.

여성가족부 등 유관 주무부처에서 재원을 확보하여 공공기관 등에서 선임요청이 있는 경우에 공공자문변호사단에 소속된 변호사에게 사건을 배당하고, 그 사건에 실제로 관여한 정도에 따라서 형사 국선변호인에게 제공되는 수당에 유사한 수준에서 비용을 지급하면 어떨까? 각 공공기관들로서는 비용 문제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거의 모든 사건에서 국가로부터 공인된 변호사들의 조력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될 것이고, 변호사 입장에서도 현저하게 적은 수당으로 인해서 현장 참여를 꺼리게 되는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공공기관 내 사건해결 절차에 대한 변호사 참여의 확대만이 성폭력 맞고소 문제에 대한 신묘하고 완벽한 유일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볼 만한 선택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폭넓고 심도 깊은 후속 논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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