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극장] 여자 어린이가 바꾸는 세상, 뮤지컬 ‘마틸다’
[기울어진 극장] 여자 어린이가 바꾸는 세상, 뮤지컬 ‘마틸다’
  • 윤단우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19 13:10
  • 수정 2018-10-02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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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마틸다’ 포스터
뮤지컬 ‘마틸다’ 포스터

우리에겐 주인공 소년의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보다

더 많은 마틸다가 필요하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주지 않지. 내 손으로 바꿔야지 나의 얘기. 때로는 필요해 약간의 똘기.”

공연계에서 하반기 기대작으로 꼽히던 뮤지컬 ‘마틸다’(신시컴퍼니)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가족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와도 비교되는 이 작품은 600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은 영민한 어린 배우들의 호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중견배우들의 탄탄한 어울림 속에 기분 좋은 첫발을 내디뎠다.

독서광인 다섯 살 소녀 마틸다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오만과 편견』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책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톨스토이의 책을 원서로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독학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마틸다를 엄마 아빠와 오빠는 괴상한 아이로 여기며 무시하고 방임하고, 아이들을 끔찍이 싫어하는 학교 교장 미스 트런치불은 괴롭히고 학대한다. 

아들을 원했던 마틸다의 아빠가 그녀를 ‘머슴애’라고 부르며 구박하는 장면이나 미스 트런치불이 어린 학생을 투포환 던지듯 던지는 장면은 남아선호와 아동학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문화’임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들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저런 일이!’ 하며 분노를 터트리게 만드는 동시에 ‘나도 저렇게 자랐는데’ 하며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알파벳을 활용한 대표 넘버 ‘스쿨송’은 “아이(I)로 사는 것이 죄인(J) 여긴 꿈과 풍선, 케이크(K)는 없는 진정한 헬(L)”과 같은 가사로 현실을 풍자한다.

마틸다는 어리지만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고 침묵하지 않는다. “그건 옳지 않아!”라고 외치며 속물적인 엄마 아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교장 미스 트런치불에게 맞선다. 마틸다와 상처를 공유하는 담임 교사 미스 허니, 그리고 학급 친구들이 그녀의 편이 되어 함께 싸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마틸다’ 중 ⓒ신시컴퍼니 제공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마틸다’ 중 ⓒ신시컴퍼니 제공

똑똑한 여성이 가혹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이야기, 시련을 겪는 여성이 또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 힘을 얻는 이야기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여자 주인공은 대개 가혹한 운명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그대로 파멸을 맞이하거나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사랑하는 이에게 구원을 맞이하는데, 그녀가 겪는 시련은 주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소극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으로 가장 편리하게, 또한 자주 제시되는 것은 성격 파탄자인 의부 또는 계부, 멀거나 가까운 친척, 나쁜 남자 기질이 있거나 우유부단한 성격의 첫사랑, 이웃집이나 같은 동네에 사는 남자, 지나가던 괴한 등 다양한 역할로 등장하는 남성의 성적 위협이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의 운명은 더욱 가혹한데,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이란 주로 주인공인 남성을 구원하거나, 그를 위해 희생하거나, 그에게 하룻밤 위로를 주거나, 아니면 그를 배신하고 파멸시키는 것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오로지 남성의 시련이나 성장, 구원을 위해 소모되느라 이들에게는 자기 서사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닌 남성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에 등장하고 사라지는지와 비교해본다면 더욱 확연한 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마틸다’는 나의 이야기는 내 손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하며 세상과의 싸움에 나선 여자 주인공, 그것도 여자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흔치 않은 이야기다. 특별한 능력(극중에서 마틸다는 초능력자다)을 가지고 세상과의 싸움에 나서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이며, 긴 여정 끝에 그들은 세상을 바꾸고 왕이 되거나 출발점보다 한 계단 이상 올라선 지점에서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이 모험담의 결말이었다. ‘마틸다’는 여자 어린이도 이러한 모험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또래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속물적이고 폭력적인 어른과 싸워 승리하는 주인공이 여자 어린이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며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소년 모험담의 프레임에 균열을 낸다. 한 명의 마틸다로 현재의 굳어진 프레임에 균열을 내는 것은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마틸다가 주인공인 모험담이 하나의 장르가 된다면 프레임은 아예 달라질 것이다. 우리에겐 주인공 소년의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보다, 더 많은 마틸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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