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을 착취하지 말라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을 착취하지 말라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8.09.11 08:15
  • 수정 2018-09-14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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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용수 엔도 카오리 씨(오른쪽)는 올 2월 일본 유명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여성 모델 착취와 여성혐오를 폭로했다. 그는 지난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일본의 무용수 엔도 카오리 씨(오른쪽)는 올 2월 일본 유명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여성 모델 착취와 여성혐오를 폭로했다. 그는 지난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일본 유명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여성 모델 착취·여성혐오 고발한

엔도 카오리의 ‘미투’

‘미투(#MeToo)’ 운동은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 인권을 유린해온 가해자들의 실상을 드러냈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구멍난 법제도, 힘겹게 목소리를 낸 피해자가 2차 가해에 직면하는 현실도 드러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착취를 고발한 엔도 카오리의 사례도 그랬다. 지난 4월 나온 그의 폭로는 문화예술계의 억압적·비민주적 노동환경, 여성을 남성의 성적 도구로 여기는 여성혐오를 용감하게 고발한 또 하나의 목소리였다. 

카오리는 자신의 고발이 제도와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그는 지난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에서 그간의 이야기와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날 포럼은 여성 사진작가, 모델, 변호사 등이 모여 ‘한일 사진계 여성들의 연대, 여성의 주체성과 이미지’를 논하는 자리였다.

 

일본의 무용수이자 모델인 엔도 카오리 씨가 지난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일본의 무용수이자 모델인 엔도 카오리 씨가 지난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16년간 아라키의 사진모델 활동

계약서 없이 누드촬영 강요

동의없는 사진집·DVD 판매

무보수로 여러 행사 참석

카오리는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아라키의 사진 모델 일을 했다. 본업은 무용수다. 프랑스 발레 유학 후 현지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 만난 예술가들의 제안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사진 촬영 전에는 작가와 촬영 내용, 노출 수위 등을 합의한 후 계약서를 썼다. 자신을 찍은 사진이 재사용되거나 출판될 때도 미리 내용과 모델이 받는 로열티 등을 확인하고 동의서를 작성했다. 프랑스에선 그게 당연한 절차였다. 

하지만 아라키는 계약서도 쓰지 않고 누드 촬영을 요구했다. 동의 없이 ‘KaoRi Sex Diary’ 등 제목을 붙인 사진집·DVD 등을 제작해 판매했다. 촬영 현장에 외부인을 부르고 누드 촬영을 강요하기도 했다. 아라키의 사진이 유명해지면서 카오리가 아라키의 개인전 오프닝, 취재 등에 동행하는 일이 점점 늘었고, 그 자리에서 ‘댄스 퍼포먼스’ 요구 등도 받았다. 대개 무보수 노동이었다. 사진을 찍고 용돈 수준의 돈을 몇 번 받은 게 전부였다. 아라키가 “모델의 신비함을 지킬 것”을 요구했기에 다른 작가와 일할 기회도 잡지 못했다. 

 

2013년 5월부터 6월까지 일본 도쿄 타카 이시이 갤러리에서 열린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의 한 장면. ⓒ아라키 노부요시 홈페이지 캡처
2013년 5월부터 6월까지 일본 도쿄 타카 이시이 갤러리에서 열린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의 한 장면. ⓒ아라키 노부요시 홈페이지 캡처

‘음란한 여자’ 이미지 생겨

스토킹·가택 침입도 당해

아라키 측, “명예훼손 않겠다” 서명 요구

“작가가 사진 관련 권리 독점” 통보도

아라키는 여성과 성을 소재로 한 사진으로 ‘대담한 예술가’ 혹은 ‘변태’로 불리는 유명 작가다. 나체의 여성들을 밧줄로 묶고 찍은 사진, 마치 성관계 도중 여성을 촬영한 듯한 사진 등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과거 인터뷰 중 “사진에서 여성을 묶고 가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그렇게 해야 여자는 아름답기 때문이다”라고 한 바 있다. 2003년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모임 ‘영페미니스트미술가연대’는 당시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아라키의 전시회를 두고 ‘여성 대상화를 그만두라’고 비판하며 ‘안티 아라키전’을 열기도 했다. 

아라키와의 작업은 카오리에게 ‘음란한 여자’, ‘마음대로 해도 좋은 여자’라는 낙인이 됐다. “누드가 아니어도 된다”는 제작진의 말에 평범한 사복 차림으로 나간 NHK 방송에선 그의 가슴 노출 장면이 방영됐다. 스토킹, 가택 침입도 당했다. 피해 회복에 드는 금전적·정신적 부담이 너무 컸다. 스트레스로 길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아라키는 “난 몰라” “관계없다” “잊어라”라고만 했다. 카오리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라키는 자신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는지, 그게 어떻게 날 아프게 하는지 관심 없이 날 물건처럼 다뤘다”고 썼다. 

미디어는 카오리를 ‘아라키의 영원한 뮤즈’로 불렀다. 아라키는 인터뷰에서 그를 ‘내 여자’로 부르거나, ‘모델들이 날 두고 싸웠다’ ‘삼각관계’ 등 발언을 했다. 그러나 카오리는 “나는 아라키와 일한 모델들 중 하나일 뿐, 연인이 아니며 그와 사적인 관계의 선을 넘은 적도 없다”고 반박했다. 

2016년 2월 카오리는 아라키에게 “더 이상은 한계”라며 시정을 요구했다. 아라키 측은 오히려 “아라키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영업방해 행위를 하지 않겠다”라는 각서를 내밀었다. 카오리는 ‘서명하지 않으면 앞으로 일할 수 없다’라는 두려움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후 갑자기 촬영 계획이 취소됐다. “뮤즈 역에서 해고됐다.” 문제를 제기해도 아라키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자살하려 했다가 ‘미투’ 운동에 용기를 냈다. 올해 2월 카오리는 대리인을 통해 아라키 측에 “사진에 대한 내 권리를 인정하고 공개 범위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아라키 측은 “사진에 대한 권리는 모두 내 것이다. 모델에겐 어떠한 권리도 없다”며 거절했다. 4월 1일, 카오리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그간의 일들을 세상에 알렸다.

 

엔도 카오리가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착취를 고발하는 글. ⓒ온라인 캡처
엔도 카오리가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착취를 고발하는 글. ⓒ온라인 캡처

“동등한 예술가로 존중 않고

성적대상으로 소비해 배신 느껴

모델의 표현과 권리 존중해야”

카오리는 무엇보다도 동등한 예술가로서 협업했다고 믿었던 작가가 “나를 한 명의 예술가로 존중하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만 소비한 데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저는 아라키의 작품에 감동해 모델이 됐고, 내가 (작품 제작에) 어느 정도 공헌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 아라키의 문제는 초상권, 저작권 이전에 인권을 침해했다는 겁니다. 프로건 아마추어건 모델의 표현과 권리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폭로 후 반년이 흘렀지만, 당사자인 아라키도 일본 사진계도 침묵하고만 있다. “제 문제제기는 일본 사진계·미술계에서 거의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아라키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죠. 본인이 ‘나는 사진의 신’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이 차마 입을 열 수 없는 상황 아닐까요. 일본은 그렇다 치고 그의 전 세계적 영향력이 걱정입니다. ‘성관계 도중 동의 없이 사진 찍어도 괜찮다. 그것도 예술이다’ 식의 인식이 퍼지면 문제죠.” 

“한번 찍히면 못 지우는 사진

창작자에 큰 책임 따라

계약서 등 논의 시 갤러리·소속사 등

관련 주체들도 책임 지고 개입해야”

카오리는 한국 사진계 인사들에게도 민주적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한 여러 조언을 전했다. 그는 폭로글에서 “한 번 찍히면 죽어도 지워주지 않는 사진 예술 행위의 무서움”을 언급한 바 있다. “완전히 보호받지 못한 상황에서 모델 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창작자들은 자기 작품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델들에게는 “작업 내용이나 계약을 논의할 때, 사진작가만이 아니라 출판사, 갤러리, 작가 소속사 등 관련 주체들과 함께 논의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사진이 화제에 오르고, SNS에 유포되고, 사진집이 발매되는 것만으로도 모델은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 항의해도 ‘사진 잘 나왔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식입니다. 작가들은 보통 작품에 대한 열정에 차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하기도 하고요. 작품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는 갤러리도 이런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다음 달 일본에서 패션계 내 촬영 시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는 방안 등을 논하는 모임이 열린다. 카오리는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돌아가 전달하고 논의하겠다”며 “모델의 지위, 여성 예술가들의 지위가 제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미투운동에 큰 용기 얻어

혼자 고민보다 사회 문제임을 알리자”

그는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분들에게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미투 운동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이 내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임을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잘못된 선택만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도 차라리 죽어야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절망했던 적 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걸, 극복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그가 블로그에 쓴 고발문은 이렇게 끝난다.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다(Living well is the best revenge).”

 

엔도 카오리가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착취를 고발하는 글. ⓒ온라인 캡처
엔도 카오리가 지난 4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착취를 고발하는 글. ⓒ온라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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