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광복절 맞아 독립유공자 177명 포상

배화여고 학생 6명 등 여성 독립유공자 26명 발굴·포상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과감하게 3·1운동을 재현했던 배화여학교 소녀 6명, 만주 서간도에서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나섰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곽영선 선생, 비밀결사를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했던 여성 5인,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던 이은숙 여사....

국가보훈처는 15일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17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했다. 건국훈장 93명(애국장 31, 애족장 62)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8명으로, 이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26명이다. 이날 상을 받은 주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소개한다.

 

(왼쪽 상단부터) 배화여학교 학생 박양순·김경화·성혜자·소은명·안옥자·안희경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 옥고를 치를 당시 사진.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왼쪽 상단부터) 배화여학교 학생 박양순·김경화·성혜자·소은명·안옥자·안희경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 옥고를 치를 당시 사진.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일제 감시에도 3·1운동 재현한 배화여학교 학생 6인

대통령 표창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 6명에게 돌아갔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98년 만에 인정됐다. 당시 거의 10대 후반이었던 배화여학교 학생 수십 명은 치밀한 준비를 거쳐 당일 등교하자마자 일제히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재판을 받았다. 일제가 만세시위 재연을 우려해 서울시내 곳곳에서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던 때에 어린 여성들이 과감히 벌인 시위였다. 이들 중 김경화(金敬和)·박양순(朴良順)·성혜자(成惠子)·소은명(邵恩明)·안옥자(安玉子)·안희경(安喜敬)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이 포상의 영예를 안았다. 최연소자인 소은명 선생은 당시 16세에 불과했다.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와 그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국가보훈처 제공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와 그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국가보훈처 제공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독립군의 어머니’ 허은 여사

만주 서간도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에 헌신한 허은(許銀)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허 여사는 재종조부인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許蔿) 선생이 순국한 후, 줄곧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부민단(扶民團) 등 현지의 독립운동 단체가 주관하는 국치기념일, 개천절 행사 등에 참여해 ‘국치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 정신을 키웠고, 16세가 되는 1922년 독립운동가 이병화(李炳華)와 결혼했다. 허 여사는 이후 1932년 귀국할 때까지 남편 집안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서로군정서 회의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식사를 조달하고 독립군들의 군복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하였다. 허 여사의 친정과 시댁 모두 여럿이 서훈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손꼽힌다. 여사에 대한 포상은 시조부 이상룡 선생이 남긴 『석주유고』, 시부 이준형 선생의 「유서」,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등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돼 이뤄졌다.

“자유를 원한다” 법정에서 당당히 독립만세 이유 밝힌 곽영선 선생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곽영선(郭永善)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곽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만세시위에 참가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돼 징역 8개월을 받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9월 법정에서 자신은 “인도정의,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인민의 인성으로” 당연히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시위참여는 “일본에 반항하는데 있지 않고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밝혀 일제 판사를 당혹게 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당시 판결문 등에서 만세 시위 활동 내용이 확인돼 이뤄졌다. 1993년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곽림대(郭林大) 선생의 딸로, 부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서훈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비밀결사 조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여성 5인

평안남도 순천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최복길(崔福吉)·김경신(金敬信)·김화자(金花子)·옥순영(玉淳永)·이관옥(李觀沃) 선생 등 5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이들은 1919년 음력 10월 평남 순천에서 윤찬복(尹燦福) 등과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회원들로부터 의무금 등을 징수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 밀사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 단체 주모자로 회계를 맡았던 최복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한 나머지 4인에겐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이들에 대한 포상은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 자료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돼 이뤄졌다.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 ⓒ국가보훈처 제공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 ⓒ국가보훈처 제공

만주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자금 마련 등 도운 이은숙 여사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이은숙(李恩淑)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 여사는 1889년 충남 공주 출신으로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李會榮)과 결혼했다.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도왔다. 1919년 남편과 함께 다시 중국 북경으로 이주해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에 귀국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은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돼 옥중 순국했다. 아들 이규창(李圭昌)은 1935년 3월 상해에서 친일파 처단 후 피신하다가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징역 13년형을 받아 복역할 때도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외에도 서정적인 시풍으로 일제에 저항의식을 표출한 김윤식(김영랑) 선생에게 건국포장이,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체포돼 순국한 계석노(桂錫魯) 선생과 평안북도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한성호(韓成浩)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만912명,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표창 2887명 등 총 1만5052명이며 여성은 325명이다.

정부는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을 개선하고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전문가 용역 등으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포상했다. 특히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전문가 연구용역을 실시해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추가 조사와 검증을 거쳐 26명을 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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