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일본군 하사관 구보타테츠지, 피해자에게 최초 고백

“6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침략의 최전선에 있었다. 1940년 4월 2일 중국 호국성 한구(漢口)에 상륙하면서 침략의 일보를 내디딘 후 패전까지 우리 일본군이 끼친 재앙의 깊이는 어떤 말이나 문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피해자(그는 위안부라 부르지 않고 피해자라 불렀다. 군인의 입장에서 위안을 받았으니 위안부가 맞겠지만 그들은 성 노예로 피해자였다고 말했다)들의 굴욕의 시간들도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우리는 피해자의 귀중한 인생의 모든 권리를 빼앗았다. 어떤 식으로든 결코 용서가 되진 않겠지만 피해자 여러분의 고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정말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드린다.”

(구보타테츠지 久保田哲二·82)

지난 23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대표 곽동협)이 대구 곽병원 강당에서 개최한 ‘남경대학살 참전군인 증언 강연회’에서 구보타테츠지는 남경대학살과 위안부할머니들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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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의 경영은 업자가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안소의 설치 목적은 장병들의 살벌한 기운을 완화시키고 군기와 전투의욕 고양에 일조함에 둔다. 위안소 업무의 감독지도는 경비대장을 임명한다’고 명시된 것처럼 실제로 위안소의 경영은 전면적으로 군에서 관리했고 난 위안소를 직접 관리하는 ‘경비대 본부 서무계의 접수’를 담당했다.”

강제 연행된 피해자들은 개인방에 감금되었고 현지에서 오랜 굴욕적인 생활은 모두 이 개인방에서 자행되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의 담 밖 외출은 허락되지 않았고 군인들은 피해자를 성노예로 삼았다. 매일 반복되었던 일이지만 그 중 1943년 5월 의창 남쪽에 있었던 강남작전이 있기 1주일 전부터 의창백작사위안소 앞에는 수많은 병사가 줄을 서 기다릴 정도로 혼잡했다. 위안소의 사용시간은 병이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사관은 5시부터 7시, 7시 이후는 장교로 규정되어 있었다.

“난 하사관이라 5시 이후에 가면 피해자들은 마치 시체처럼 괴로운 자세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강제로 깨우는 동료도 있었지만 어떻게 해도 어느 한 사람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구보타테츠지는 전했다.

하사관과 장교의 위안소

이용시간은 오후 5시 이후

이때 피해자들은 마치

시체처럼 괴로운 자세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강제로 깨우는 군인들도

있었지만 어느 한 사람

일어나는 것을 못봤다

구보타테츠지는 1939년 히로시마 보병으로 참전해 1945년 패전까지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당시 난 민족차별 사상으로 우월감에 젖어 중국과 조선민족은 열등민족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 곳에서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생체실험을 했으며,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털어 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시베리아에서 전쟁포로로서의 생활과 중국인민공화국 무순전범관리소에서 전범으로 6년간 구류생활을 하는 동안 깊이 반성했다는 구보타테츠지는 전범재판관리소에서 신문을 받던 중에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모두 고백했다고 한다.

“죽을 줄 알았는데 중국민들은 나를 살려주었다. 우린 그 전쟁에서 85만7천명이나 죽였다. 그러나 중국민들은 우리와 똑같이 하지 않았고 책임자 45명만 유죄선고를 하고 나머지 1천여명은 석방했다. 난 그 후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의 잘못을 느끼면서 이와 관련된 증언작업을 하고 있다.”

이에 이용수 할머니는 “그러면 우리를 위해 왜 1992년에는 증언해 주지 않았느냐. 우리가 빨리 죽기를 기다렸느냐”고 묻자 “피해자들을 패전시 퇴각하며 방치했고, 일본군과 같이 자결을 강요받은 사람과 집단 사살된 것으로 알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피해자들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5년 전부터 남경대학살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보타테츠지는 일본으로 돌아온 후 ‘중국귀환자연락회’(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평화와 일본과 중국의 우호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지금까지 각종 증언 활동을 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참회하고 고백하며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할 것”이라며 “우리를 천황제일본군국주의로 세뇌시켰던 것은 국정교과서였다. 침략전쟁이 아시아 해방의 성전으로 믿고 침략의 총을 들어 아시아 국민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다시 침략전쟁의 길로 들어가는 가장 위험한 교과서라는 것을 알면서 간과할 수 없었다. 아시아 국민들과 연대하여 투쟁한 결과가 있었지만 검정 합격한 위험교과서가 있는 한 우익의 음모를 기억하며 투쟁할 것”이라고 구보타테츠지는 밝혔다.

이 강연회를 개최한 곽동협 대표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대부분 고령이라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에 참가한 일본군의 증언과 사죄의 자리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나 강제징용·군속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사죄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증언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가해자가 직접 진실을 말하는 자리여서 그 의의가 컸다 .

경북 권은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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