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 BBC는 워킹맘의 비율이 1970년대에 비해 50%나 증가했다는 소식을 기사로 다뤘다. 제목만 보면 “이제 여자들도 많이 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됐구나” 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제대로 읽어보면 아직 영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기사다.  

필자는 1995년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에서 영국으로 조기 유학을 온 후 영국에 정착해서 듬직한 영국인 남편과 귀염둥이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워킹맘’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여자라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고 믿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던 커리어 우먼이었다. 런던 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세계 4대 회계·컨설팅 회사 KPMG에 입사해 빠르게 승진했다.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정말 내 잘난 맛에 살았던 철부지였다. 결혼 후 예정에 없던 빠른 임신과 출산 후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으며 충격을 받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를 낳고 만난 영국 워킹맘 친구들 대부분도 나처럼 열심히만 하면 여자로서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고 믿고 있다가, 아이를 낳고 나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필자의 경험과 주변 영국인 워킹맘의 경험을 얘기해보려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첫 출산 후 엄마로서 큰 변화를 겪는다. 한국에는 호텔 수준의 산후 조리원이 많지만 영국엔 아직 그런 시설이 많이 부족하다. 조리원은커녕, 자연분만의 경우 병원에서는 당일, 또는 그 다음날 바로 퇴원 절차를 밟게 한다. 필자도 제왕절개 후 3일 만에 퇴원해 집에 돌아오니 정말 막막했다. 런던 엄마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독박육아’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들은 1~2주일간 휴가를 내고 도와준 후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국 엄마들은 ‘최대한 빨리 정상생활을 찾아야 몸이 빨리 회복된다’는 병원의 조언에 따라 꿋꿋이 일상생활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는 소싯적 잘 나가던 커리어 우먼들을 눈물짓게 한다. 샤워는커녕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신생아를 홀로 키운 경험이 있는 엄마들은 그 고통을 잘 이해하리라 믿는다. 

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복직하려 하지만, 오히려 복직하면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지는 상황을 겪게 된다. 필자 주변의 변호사, 회계사, 금융 등 전문직 종사자들은 잦은 출장과 24시간 계속되는 업무로 아이를 장시간 돌봐줄 시설이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런던은 유치원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마저도 보통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하는 유치원이 대부분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보모를 찾는데, 역시 어려움이 많다. 영국에서 보모를 고용하면 고용주 자격으로 4대 보험 등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비용에 부담이 따른다. 공급과 수요의 비대칭으로 인해 보모 임금은 웬만한 고소득자가 아니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아이들이 더 커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육아 비용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국은 초등학교 고학년도 오후 3시30분이면 수업을 마치고, 방학까지 생각하면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육아 비용 부담이 줄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경우에는 더 어마어마한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영국에서도 소위 이름있는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려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기 명단에 올리는 일이 허다하다. 필자도 첫째 아이를 낳고 6주짜리 신생아를 유모차에 태우고 유명 유치원에 가서 등록 신청을 했다. 아이가 만 2세가 되니 자리가 나왔다. 그것도 1주일에 하루만 맡길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영국인 전문 보모를 고용했고, 복직 후 3년간은 월급을 고스란히 보모 고용비로 썼다. 경제적 이유만 생각한다면(정말 일하는 게 좋아서 복직한 경우를 제외하면) 많은 엄마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이유다.  

앞서 말한 BBC 기사는 통계적으로 볼 때 고소득자 남편을 둔 워킹맘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출산 후 복직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육아 비용이 그만큼 많이 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런던 거주 여성 중 출산 후 복직하는 여성들이 영국 전체에 비해 오히려 감소 추세라는 점이다. 비싼 물가와 독박 육아 비용 부담 때문에 복직이 더더욱 힘들다는 것이다.

어찌어찌 아이 돌봐줄 사람을 찾고, 유치원에 등록한다 해도 고충은 끝나지 않는다. 8개월에서 1년간 출산휴가를 보낸 후 직장에 돌아가면 회사 상황도 많이 바뀌어 있고 실질적으로 출산 전처럼 일하기 힘들다. 오후 5시가 되면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야 하고, 보모가 있어도 오후 6시30분까지는 칼같이 퇴근하게 해야 하니 예전같이 야근, 출장, 회식 등은 꿈도 못 꾼다. 아이들이 밤에 깨는 경우 회사생활을 ‘좀비’처럼 하게 된다고 워킹맘들은 웃음 반, 울음 반 섞어 얘기하곤 한다. 한국처럼 근무 시간이 길진 않겠지만, 매일매일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고 칼퇴근해야 하는 워킹맘들은 상사와 동료들 눈치 보랴, 유치원 하원 시간보다 5분이라도 늦으면 벌금을 내야 해서 눈치 보랴, 보모 눈치 보랴, 남 눈치 보는 데 고수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필자는 한국 워킹맘들을 보면 영국 엄마들은 비교적 편하게 생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영국 남편들은 육아와 집안일은 공동 책임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전반적인 영국 사회 분위기 역시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은 아빠들이 육아에 더 참여할 수 있도록 2015년부터 육아휴직을 엄마와 아빠가 나눠 쓸 수 있는 ‘공동육아휴직제(Shared Parental Leave)’를 법으로 만들었다. 영국 기업 문화는 한국과 달리 많은 외식·접대 등을 요구하지 않아서, 퇴근 후 아빠들도 함께 육아를 하는 가족이 대부분인 듯하다. 필자의 남편도 특별히 일이 없는 경우 정시에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 약속을 8년째 지키고 있다. 아내와 남편이 육아뿐 아니라 집안일도 공평하게 분담하는 가족들이 많다. 필자의 시어머니는 그렇게 남편과 시아주버니를 키우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워킹맘 1세대’다. 그 영향인지 남편도 요리, 빨래, 청소 등을 절대 여자의 일로 보지 않고 육아 역시 당연히 분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많이 변했으리라 믿고 있지만, 사무실 심부름·커피 타기 등은 여자 몫인 남성중심적 한국 기업문화는 필자에게 큰 충격을 줬다. 필자가 영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잠시 한국의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겪은 일이다. 그런 남성 중심적 문화가 한국 여성의 사회생활에 큰 걸림돌이 아닐까. 집안일, 회사, 육아 부담을 대부분 홀로 떠맡아야 하는 한국의 워킹맘들이 ‘슈퍼맘’이여야 하는 현실은 웃어넘기기엔 답답하다. 

물론 영국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필자는 영국 기업들의 워킹맘을 위한 정책과 기업 문화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다양한 정책을 갖춘 곳이 많다. 필자가 첫 아이를 낳고 복직했을 때, 상사의 도움으로 회사에서 전문 상담 코치 비용을 6개월간 지원받았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아이를 급히 돌볼 사람이 필요할 경우, 회사가 비용을 제공하는 ‘긴급 아이돌보미(Emergency Childcare)’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물론 기업들이 직접 워킹맘을 돕는 분위기는 하루 이틀 만에 생긴 게 아니다. 여성인권운동가들의 오랜 노력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등을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는 여자의 힘을 잘 이해하는 사회가 아닐까.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금융가의 분위기가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낳았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자, 영국 정부와 대기업들은 앞장서서 기업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기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성, 학력, 배경 등 면에서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영국 정부는 ‘성별임금격차 보고 의무화(Gender Pay Reporting)’ 법을 만드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 실질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하나, 한국의 실정과 비교하면 워킹맘들에게 영국 정부는 아군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세계 어디에도 아직 워킹맘의 천국은 없는 것 같다. 모든 여성들이 사회의 편견과 불공평한 제도에 제약받지 않고, 복직이건 육아건 사업이건 자신이 가장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할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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