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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세상이 온통 ‘넘어지기 대회’라도 열린 듯 너도 꽝, 나도 꽝, 좌우

사방에서 들려오는 건 우르릉 꽝, 소리뿐인 이즈음.

저 높은 하늘에서 이 지상을 향해 내려오는 하얀 눈은 모처럼 마음을

씻어주었다.

‘해피 뉴이어’가 아닌 ‘언해피 뉴이어’라고 적힌 사람들 얼굴.

펄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서울 시내 연인들 꽤나 바쁘겠다. 여기서도 데이트, 저기서도

데이트.”

옆에 서있던 누가 반론을 제기한다.

“거리가 질퍽질퍽. 데이트하기엔 꼬작지근하잖아요?”

“하이고, 사랑에 빠져봐. 하얀눈이 야들야들 춤추며 내려오는 하늘만

보이지 질퍽거리는 땅이 보이겠어?”

나의 말은 과연, 실제상황으로 드러났다.

사무실 안의 20대.그들의 몸 어딘가에 내장되어 있는 삐삐가 난리부

르스, 난리탱고였다.전화벨도 평소의 따따블.

“어머, 거기도 눈오니? 눈땜에 전화했구나? 그럼 퇴근하고 거기서

만나!”

그들의 얼굴을 보면 ‘사랑밖엔 난 몰라’였다.

경제꼴이 말씀이 아닌 이 시대에 그들의 모습을 보니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경제활동’처럼 보였다.

기역(ㄱ)자처럼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그들이 데이트 약속을 한 이

후부터 리을(ㄹ)자처럼 쌩쌩, 휭휭, 날렵해졌기 때문이다.

기역자와 리을자 사이에 무엇이 있나?라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사

랑’이라고 대답하겠다.

사랑만이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기역자 사람을 야들야들 리을자로 변

화시키는 유일한 화학작용을 하니까.

사랑을 하는 한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30-40대의 표정은 좀 달랐다.

말하자면 신세대와 쉰세대사이에 끼어있는 낀세대.

그들은 현실적인 타협파라고나 할까?

눈이 쌓이면 차를 놓고 가야한다.

그러니 소주나 한 잔 할까?... 이런 소박한 바램. 빼빼마른 낭만. 이

룰 수 없는 헛된 꿈보다는 차라리 실현 가능한 작은 것들 속에 자신

을 떨구는 것. 그들은 모처럼 소주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추억 한 귀

퉁이쯤 쓰다듬고 싶은지도 모른다.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현실의 우울함을 술잔에 녹여버리고 싶은지도

모른다.여기서도 싹둑. 저기서도 싹둑.

세상은 거대한 가위손에 의하여 잘려나가는 소리뿐이다.

샐러리맨들이 뱉어내는 한 숨을 끌어모아 가마니에 담으면 얼마나 큰

산이 될까?

낀세대들은 눈이 오는날 고작해야 소주잔이나 부딪치며 한숨을 토해

낸다.그렇다면 쉰세대, 50대 이후의 사람들은 눈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할까?

“아이고, 이 놈의 눈. 어째 어제부터 삭신이 쑤시고 온 몸이 찌뿌드

드 하더니만. 눈 녹을 때 까진 바깥 출입을 하지말아야 겠구먼. 행여

미끄러지면 무릎깨지고 골다공증 뼈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

까. 시인 K씨도 눈길에 넘어져서 몇년동안 목발짚고 다녔는데 나

라고 별 수 있겠어? 집안에 틀어박혀 TV나 봐야지 뭐...”

물론 개인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겠지만 눈오는 날, 신세대와 쉰

세대, 그리고 낀세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이야기

가 있다.

감옥에 갇힌 두사람.

한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꾼다.

“내가 이곳에서 나간 다음엔 이런일도 하고 저런 사람도 만나리

라.”

그의 눈빛엔 희망때문에 기쁨이 머문다.

그러나 또 한사람. 그는 땅만 바라보며 한숨만 쉰다.

“아이고, 내 팔자. 언제까지 이속에 갇혀있어야 하나.”

無희망, 無한숨...

그의 가슴은 시멘트처럼 딱딱해진다.

우리는 지금 어찌보면 쪽박 찬 경제덕분에 단체로 감옥에 갇힌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속

엔 시멘트 대신 별을 담아두고 싶은 건 나만의 바램일까?

...어쨌거나 긴 겨울을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눈이 내릴 것이다. 눈

이 내리면 가까운 공원

이나 숲을 거닐어 보라. 아마도 한 사람쯤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눈밭을 걷고 있는 남자 혹은 여자.

그에게 신세대냐 쉰세대냐, 혹은 낀세대냐 묻지말자.

그 따위 나이야 무슨 상관. 중요한 건 호적상의 나이가 아니라 정신

의 나이.

그는 아마도 사람. 사랑을 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아니 아직도 가슴에 온기를 품고 있기에 차가운 눈밭을 따뜻함으로

거닐 수 있는 사람.

사랑의 잔고가 아직도 남아있는 ‘말랑말랑’한 사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현대방송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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