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단역배우 자매 어머니 장연록씨 

드라마 촬영장에 알바하러 갔다

반장 등 12명에게 성폭력 피해

입은 큰 딸, 5년 만에 세상 등져

죄책감 못이긴 둘째 딸도 하늘로

피해자는 괴로움에 목숨 버렸는데

처벌조차 받지 않은 가해자 12명

“성기 그려봐” 경찰은 ‘2차 가해’

그 날 이후 진실 밝히려고 동분서주

국민청원 참여한 20만명 “감사”

경찰, 재조사하기로 결정 했지만

‘수사’ 어렵다는 말 “가슴 무너져”

해결 날 때까지 1인 시위 지속

 

단역배우 자매 어머니 장연록씨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만 잊으라”는 말이라고 했다. 장씨는 “닿을까봐 쳐다보기도 어려운 소중한 자식 둘을 잃었는데 어떻게 잊으라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14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지금, 그에게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단역배우 자매 어머니 장연록씨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만 잊으라”는 말이라고 했다. 장씨는 “닿을까봐 쳐다보기도 어려운 소중한 자식 둘을 잃었는데 어떻게 잊으라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14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지금, 그에게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09년 8월 28일 저녁 8시 18분. 18층 건물 옥상에서 한 여성이 몸을 던졌다. ‘죽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더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적힌 유서가 나왔다. 장연록씨에게 그 날 이후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큰딸 서영(가명·당시 34세)씨가 세상을 등지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9월 3일, 작은딸 서진(가명·당시 32세)씨도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서진씨는 “엄마가 원수 갚고 20년 후에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 장씨는 경황이 없어 큰딸 장례를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둘째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두달 뒤 두 딸의 잇따른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마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딸들의 유언을 버팀목 삼아 9년을 버텼다고 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둘 다 죽었겠어요. 우리 딸 원한을 엄마가 풀어줘야죠.”

 

드라마 현장서 만난 12명의 가해자

사건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큰딸 서영씨는 둘째 서진씨 소개로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한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서영씨는 여성단체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등 여성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모범생이던 그는 동생의 권유에 재미 삼아 단역배우로 활동하기로 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던 그는 단역배우를 시작하고 3개월 가량이 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실을 서성이거나 살림을 부수며 극도로 불안해했고,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이며 “죽이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엄마와 동생이 이를 말리면 욕설을 하고 죽이겠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결국 가족들은 서영씨를 정신병원에 데려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상담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단역배우들을 관리하는 기획사의 반장, 보조반장 등 12명이 서영씨를 성폭행, 성추행을 했다. 반항하면 칼을 들이밀며 ‘동생을 팔아넘기겠다’ ‘집에 불 지르겠다’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다고 한다.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적 충격을 받은 큰딸은 협박이 무서워 피해 사실도 알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길로 장씨는 경찰서로 달려가 가해자 12명을 고소했다. 장씨는 “경찰에 고소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장씨 모녀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다. “고소를 했기 때문에 제가 죄인입니다. 지금도 고소한 걸 후회해요. 고소를 안 했으면 제 딸들이 죽지 않았을 거에요.” 장씨는 “성폭행 가해자들은 12명이지만 죽게 한 것은 경찰”이라고 말했다.

장씨에 따르면 사건을 맡은 첫 수사관은 제출한 증거들은 보지도 않고 “이게 사건이 되겠느냐”고 윽박질렀고, 또 다른 수사관은 큰딸에게 “가해자 성기를 색깔, 둘레, 사이즈까지 정확하게 그려오라”고 수치심을 주기도 했다. 피해자가 진술하는 한 공간에서 가해자가 조사를 받기도 했단다. 조사 도중 경찰서를 나온 서영씨는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런데 수사 2년 만인 2006년, 큰딸은 갑자기 고소를 취하한다. 장씨는 “심신미약, 항거불능 상태였던 딸이 스스로 취하했다는게 말이 안된다. 고소를 진행한 내게는 연락 한 통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뒤 2009년 서영씨는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의 유골이 담겼던 유골함을 열어 보이고 있다. 장씨는 여기에 딸들의 애장품을 담아놓고 가끔씩 꺼내본다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두 딸의 유골이 담겼던 유골함을 열어 보이고 있다. 장씨는 여기에 딸들의 애장품을 담아놓고 가끔씩 꺼내본다고 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투가 두 딸 원한 풀 기회 줘

이 사건은 지난 2012년 세간에 ‘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으로 처음 알려졌다. 충격적인 사건 내용과 경찰의 심각한 ‘2차 가해’가 보도되자 대중은 공분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시민들이 재조사를 청원했지만 경찰과 검찰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이 사건이 재조명 받은 것은 최근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이 확산되면서다. 미투 운동이 9년 전 미투를 외친 서영씨를 소환한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조사 촉구 청원글이 올라오고 언론이 연이어 보도하면서 국민적 관심사가 되자, 경찰은 3월 29일 재조사를 결정했다.

재조사 결정 다음날 만난 장씨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꿈일까, 잠에서 깨면 없는 일이 될까 불안해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정말 10년 했더니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둘째가 ‘원한 갚고 20년 뒤에 만나자’고 했는데 말처럼 되는가 봐요.”

“20만명이 넘는 분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참여해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해요. 한분 한분이 밀알이잖아요. 전 국민청원 게시판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어요. 너무 떨려서. 10만명만 돼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올라가더라고요. 여대 앞에서 학생들에게 청와대 청원을 부탁하며 유인물을 돌렸는데 학생들이 핫팩이며 커피를 가져다 주는데, 그런 관심은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조사는 하지만 수사는 어렵다”는 경찰 반응에 대해 장씨는 기막혀 했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검토해봐야겠지만 (재수사가) 법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장씨에겐 희망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경찰이 엮여 있으니 수사가 힘든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공소시효가 지났고 증거도 없어서 수사가 힘들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증거가 없어요. 기록이 남아 있고, 엄마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제가 바로 증거예요. 두 딸과 아빠의 죽음이 확실한 증거죠.”

직접 경찰에 가해자들을 고소 하고, 큰딸 곁에서 수사과정과 증언을 지켜본 본인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있냐는 말이다. 현행 법으로 어렵다면, 특별법 제정을 통해 사건을 재수사 해달라고도 했다. 최민희 전 국회의원이 현역이던 2012년 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법 제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장씨는 “최 전 의원처럼 저희에게 관심을 가져준 국회의원도 없다”면서 “다른 의원님들이 특별법 제정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고 간청했다.

그 ‘반장’들은 아직도 현장에

처벌받지 않았던 ‘반장’ 가운데 7명은 아직도 드라마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장씨는 혹여 드라마 엔딩 크레딧에 그들의 이름이 나올까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 석자 조차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각 방송사에 “제발 그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지난달 27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도 가해자들이 업계에서 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방송사에서는 가해자들을 전혀 몰랐다고 해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기획사들은 이 가해자들에게 어떻게 일거리를 줄 수 있나요.” 장씨가 방송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최근 여론이 움직여서야 “그 이름을 빼겠다”는 방송사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장씨는 방송사 관계자에게 “그 말씀 믿겠다”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총 4명 중 2명은 현직에 남아 있다. 문제가 불거졌지만 해당 경찰들은 별다른 징계도 받지 않고 근무 중이다. 최근 한 방송사를 통해 만난 경찰관은 아예 “사건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 장씨를 분노케 했다.

“우리 딸 영정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가서 그 형사를 만났는데, 오히려 핸드폰 카메라를 나를 촬영했어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라고요.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우리 딸들은 죽었는데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니 말이 돼요? 이게 나라입니까? 정말이지 무전유죄, 유전무죄에요.”

 

자살위험군에서 상담가로

장씨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만 잊으라”는 말이라고 했다. 위로라고 건네는 말이 오히려 장씨에게는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 유언에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해요. 아니, 어떻게 잊어요. 내 딸 일인데. 딸 죽은지 14년 밖에 안됐어요. 아직도 어제 일 같아요. 제가 100년도 살아있다면 해요. 자식 낳아본 부모라면 누구나 그럴 거에요. 닳을까봐 쳐다보기도 아까운게 자식이에요. 그렇게 소중해. 자식 둘을 잃었는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겠어요. 어떻게 잊겠어요. 제게 잊으란 말 하지 마세요. 못 잊어요.”

한때 장씨는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될 만큼 위태위태했다. 공무원 등이 일주일에 한 번씩 장씨의 집을 찾아 안부를 확인했다.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 찬 방바닥에 앉아 날마다 술을 마셨고, “두 딸을 따라 가겠다”는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자들도 뉴스타파, JTBC, 경향신문 등 기자들이 장씨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꾸준히 만남을 지속했다. 기자들은 “억울함을 책으로 알려보자”며 매주 한 번씩 장씨를 찾았고, 장씨는 속 얘기를 털어놓고 글로 만들면서 조금씩 마음을 치유해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책을 만드려는 것보다 날 살리려고 만났던 거에요. 참 고맙죠. 최근에는 많은 시민분들이 두 딸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조금씩 웃기도 해요.”

서울시자살예방센터가 운영하는 유가족 자조모임 ‘자작나무’ 활동도 그의 마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자살위험군이었던 그는 이제 다른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상담가가 됐다.

장씨는 사건 재조사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온 국민이 사건을 알 때까지, 살아있는 한 알리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사건이 풀리면 딸들이 뿌려진 파주 용미리 인근으로 삶터도 옮길 생각이다.

“앞으로도 1인 시위는 계속 할 거에요. 아직까지 사건을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가해자들, 공범들이 업계에서 발 붙이지 못할 때까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에요. 우리 딸들을 위해 끝까지 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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