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언 덕
밤 언 덕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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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게 연습 없이 시작한 거라, 실수도 있는 법,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야 연습 없이도 잘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같이 야물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그 인생이란 것이 세 번까지는 좀 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억지도 좀 부려보고도 싶었다. 무슨 게임 같은 걸 할 때도 삼세번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이번에 또 실패하면 그때부터는 이제 정희숙이 인생에서 결혼같은 거는 네 번 다시 없으리라, 하는 각오 아닌 각오까지 새기고 아름이 엄마를 따라 그 남자와의 약속장소엘 나갔던 게 지난 일요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다. 그 남자로부터 이번 일요일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노라고 아름이 엄마가 알려왔었다. 한편으론 착잡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묘하게 설레기도 하는 기분을 아이들에게 들킬세라 희숙은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었다.



약속시간은 저녁때였으므로 낮 동안 일요일이면 늘상 해왔던 밀린 빨래를 다하고 아이들 데리고 목욕탕까지 다녀왔다. 저녁에 약속을 해놨으니 어쩌면 늦을지도 모를 걸 대비해서 일주일치 먹을 반찬을 미리 준비해놔야 했다. 반찬거리를 사러 언덕 아래 수퍼에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빈손이라 상관없는데 이 동네는 올라올 때가 문제였다.



짐을 들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올 때는 정말 고역이었다. 그럴 때마다 언덕 아래 빤히 마주보이는 저 아래 아파트 동네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배추며, 아이들 먹을 간식거리며, 야채가 잔득 든 비닐꾸러미를 질질 끌다시피 하고 올라오며 문득, 그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 이제 이렇게 가파른 동네에 살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치는 기분도 그리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제가 같이 들어줄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다. 희숙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지난 번 인구조사 나갔던 사람이예요.”



“아, 네에.”



그럴 필요도 없건만, 희숙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사온 지 일년동안 통 동네사람들을 모르고 살다가 지난번 아르바이트 한 덕에 이젠 웬만한 동네사람들 얼굴은 알아보지요.”



묻지도 않았건만 여자가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좀 의아하기도 하고 별스럽게 살갑게 구는 것이 희숙은 좀 불편했다. 아름이 엄마처럼 친한 사이에서도 상대가 수다스러운 것은 불편해하던 희숙이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니 오죽하랴. 저런 사람들하고는 애당초 상종을 안하고 사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희숙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유별나게 구는 사람들이라는 게,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호의를 상처로 되돌려주기 딱 십상인 사람들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그러니까, 동수 애비와 함께 살던 동네에서도 그런 일을 겪었다. 나중에 희숙의 집 사정을 환히 꿰고 난 수남이 엄마란 여자는 희숙의 큰아이들하고 동수가 성이 다르다는 소리를 사방에다 하고 다녔던 것이다.



단지 희숙이 망나니 영주 애비와 이혼하고 서로 맘이 맞아 동수 애비와 재혼을 했고 동수가 태어나서 당연히 동수의 성은 동수 애비 성을 따르게 되었을 뿐인데도 성이 다른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실이 무슨 큰 죄나 되는 것처럼 부녀회며 동네 사람들 입에 쉬쉬하며 오르내리게 되는 일이 잦아졌고 자연스럽게 큰아이들 어깨가 움츠러들게 되었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해오라고 했다며, 큰아이가 울먹이는 소리로,



“엄마, 그러면 아버지는 김씨고 우린 유씬데 그럼 어떻게 아버지 성을 써야 돼?”



하던 것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학교에서 숙제로, 효를 깨우치는 운동을 한답시고 조상을 조사해 오라고 했다는 거였다. 큰아이는 그러면 나는 김씨 조상을 적어야 하는지, 유씨 조상을 적어야 하는지, 희숙도 잊어버린 제 친애비 본관이며 유씨 집안 조상들을 물어오던 거였다. 어쩌면 그런 일들도 동수 애비와의 결혼생활에서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건지도 몰랐다. 동수가 태어나고 나서 어느 날, 큰아이들 이름을 부르는데, 그는 무심코, 야, 유영주 했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희숙의 신경줄이 파르르 떨려왔다.



"영주면 영주지, 무슨 놈의 유영주야? 여기가 무슨 학교야? 누구 편가를 일 있어?”



동수 애비와 파국으로 가기까지의 갈등의 요인들을 짚어보자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늘 그 장면이었다. 김씨 아버지와, 아이들하고는 단지 친아버지라는 것 뿐 이제는 아이들의 생활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혀 남이 된 유씨 아버지성을 따른 아이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서먹함, 긴장, 불편함. 기실 그 긴장, 그 불편함은 김씨성 아버지와 유씨성 아이들이 만든 것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단지 성이 다를 뿐인 사람들이 어떻게든 한번 살아보겠다고, 어떻게든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아버지 하나 만들어 살아보겠다고, 죄가 있다면 성이 달라도 아버지 삼을 수 있고 성이 달라도 내 새끼 삼을 수 있다며 피눈물 나는 애를 쓴 죄밖에 없는 사람들한테 세상은 격려보다는 상처를 먼저 안겨주던 거였다.



수남이 엄마의 수다로, 가정환경조사서로, 조상 알아보기로… 그러니, 이렇게 말많은 여자와 깊이 사귈 일은 못되는 것이다. 희숙은 여자가 짐을 같이 들어주겠다며 내미는 손을 홱 뿌리치고는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며 뛰다시피 집으로 와버렸다.



저녁약속시간에 맞추려고 서두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름이 엄마였다. 아름이 엄마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유난히 기가 죽어있다.



“저어기, 영주엄마, 오해는 말고 들어줘. 내가 말야, 중대한 실수를 해서, 사실은 애가 셋이란 말만 했지, 그 애들 중에 아들이 있단 소리를 못했는데 그 사람이 전화가 화서 묻더라구. 그집에 애들이 딸이냐, 아들이냐.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줬더니 글쎄…그 사람이 말야, 영주엄마가 싫다기보담은, 거 뭣이냐, 내 단도직입적으로 다 말할게. 그러니까 말이야, 애들은 셋이건 넷이건 상관없는데, 그러니까, 그 아이들 중에 아들이 있어서, 딸들이야 시집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두고두고 호적이 안바뀌잖어.



딸들은 지 서방 호적 따라가면 끝나지마는, 그래서, 그 선생님이 좀…. 내말 오해는 진짜 말아줘. 그러니까 내 말은, 영주엄마는 정말정말 맘에 들고, 애들도 셋이건 넷이건… 그러게 여자는 일부종사를 해야… 난 일부종사 할거야. 제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그게 나아. 그나저나, 영주엄마, 짠해서 어쩐다냐. 우리 영주엄마…”



얼어죽을 우리 영주엄마라지. 남자가 퇴짜를 놓았다는 사실보다도 아름이 엄마의 사설이 더 욕되게 느껴져서 그 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평소에 경상도 말 썼다가 전라도 말인지, 서울말인지 분간도 안되는 말을 썼다가 하는 아름이 엄마 말을 따랐던 것부터가 잘못인지도 몰랐다. 아니다, 아름이 엄마는 잘못이 없다, 내가, 내 약한 마음이 잘못이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지? 한때나마 결혼을 꿈꾸었다는, 세 번째 결혼을 꿈꾸었다는 사실이, 그것도 아이가 셋이나 딸려 있고 더군다나 호적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아들까지 있는 여자가 결혼을 꿈꾸었다는 게 서러웠고 그러다가 왜 서러운지, 왜 서러워야 하는지 모르는 채 희숙은 종내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그 남자와의 결혼의 가능성이 깨진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인가, 자문해봤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아 도리질은 쳐지면서도 눈물은 이상하게 멈추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애들이 보면 엄마 왜 우느냐고 물을 것이 겁나, 희숙은 그만 슬며시 집을 나와 골목 언덕배기에 서서 눈물을 말렸다. 저 아래, 아이가 셋이건 넷이건 상관없지만 아들은 싫어서 희숙을 더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가 사는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였다. 하릴없이 그렇게 아파트의 불빛을 바라보며 얼굴에 바람을 맞고 있는데, 누군가 희숙의 어깨를 툭 쳤다.



아까 봤던 그 인구조사원 여자였다. 그 여자의 등허리에는 이제는 엄마 등에 업힐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 아이가 업혀 있었다.



희숙은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럽긴 하지만 그 서러운 기분마저도 자신만의 기분인데, 그런 자신만의 기분을 누릴 수 있는 금쪽 같은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없는 것을 안 아이들이 언제 희숙을 찾아 밖으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금쪽 같은 시간을 방해한 사람이 인구조사원 여자라니. 순간, 앞으로 이 동네에서 살 일이 여자 때문에라도 아득해지는 거였다. 희숙의 속마음이야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예의 반갑잖은 수작을 붙여올 태세였다.



“울고 있었어요?”



(남이야 울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울지 마세요. 엄마가 울면 애들 가슴은 찢어진답니다.”



(지가 뭔데 충고까지. 어른가슴 찢어진다는 건 들었어도 애들 가슴 찢어진단 소린 첨듣네.)



“난 울고 싶어도 절대로 울지 않는답니다.”



문득 여자가 후유, 한숨을 쉬고 난 뒤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놓는다. 아이가 맥없이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여자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는다. 희숙이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여자의 수작이 한정 없이 길어질 것 같아 한마디 툭 뱉는다.



“아이가 아픈 모양인데 빨리 들어가 보시지 그래요?”



“늘 이 시간에는 여기 이렇게 나온답니다. 낮에는 남의 이목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 왕래 뜸한 밤에라도 바람 좀 쐬게 하려고. 아까 낮에 제가 혹 실수를 했던가요? 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 혹시 언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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