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산업에서 이 시대 최고의 여성 CEO를 꼽으라면 단연 미국 휴렛팩커드(HP)의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 46) 회장이 떠오를 것이다.

1999년 7월 HP 이사회에 의해 존 영 회장의 후임으로 CEO로 내정될 때부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타고난 카리스마와 활동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그녀는 HP의 명성을 되찾는데 총력을 기울여왔고 나아가 전 세계 IT산업을 자신의 세상으로 만들려는 야무진 꿈과 야망을 착실히 행동으로 옮겨왔다.

컴팩 인수발표후 반응 냉담…HP주가 곤두박질

경영실적 저조, 최고의 여성 CEO자리 흔들

최근 그녀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쟁사인 컴팩컴퓨터를 250억 달러에 인수키로 한 것도 이러한 그녀의 꿈과 야망을 실현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계획대로 HP가 컴팩 인수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면 그녀는 컴퓨터 업계의 최대 회사인 IBM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기업의 총수가 되어 세계 IT업계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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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여의도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한 취업희망자가 ‘존경할 만한 CEO’라는 설문조사에서 피오리나 회장에 한표를 더하고 있다.

<사진·민원기 기자>

그러나 그녀는 지금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컴팩 인수를 계기로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위업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그녀가 전임 CEO들과 달리 매우 공격적인 경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HP는 올들어 실적이 계속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매출 목표는 시간이 갈수록 실적치와 멀어지고 있다. 전 세계 IT산업의 침체가 한몫을 했지만 회장 취임 이후 과감하게 도입해온 경영 방식들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3분기 순이익은 무려 80%나 격감한 것으로 발표됐다. 또 피오리나가 CEO로 취임한 뒤 HP는 지난 1939년 창업이래 처음으로 대규모 감원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공동 창업자인 윌리엄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가 회사 경영의 근본 이념으로 삼았던 ‘HP Way’, 즉 HP정신에는 사람을 중시한다고 하는 대목이 들어 있는데 피오리나는 올 들어 이미 7천여 명을 해고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처에 대해 그녀를 비난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HP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기업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역작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컴팩 인수가 뜻대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피오리나는 컴팩 인수를 발표하기 며칠 전 미국의 유명한 IT잡지인 <비즈니스 2.0>의 한 기자에게 “나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을 경영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경쟁사를 인수함으로써 힘을 하나로 합치고 이렇게 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겔 철학 이론에 근거하여 컴팩 인수합병을 결심하고 이를 세상에 공표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합병발표 후 HP주가는 계속 곤두박질하여 지난 해 9월 63달러 선에 달했던 주가가 최근 들어 바닥을 모르고 추락, 18달러 선까지 내려앉았다. 컴팩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합병 거래가치가 처음 발표 때 250억 달러였던 것이 190억 달러 선으로 내려가 무려 60억 달러가 싹둑 잘려나갔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시와 IT업계 전문가들이 양사의 합병효과에 대해 점점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미국 월(Wall)가는 너무나 냉정하여 최고경영진에게 만회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고경영자가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되풀이하여 끼치게 될 경우엔 더욱 그렇다.

피오리나는 2년 전 루슨트 테크놀러지에서 HP 회장으로 영입될 당시 “나에게 적어도 3년의 시간을 달라”는 조건을 내세웠었고 HP이사회는 그녀의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제 2년이 훌쩍 지나가고 1년이 채 안 남았다. 과연 그녀가 21세기 초 세계 IT업계를 주름잡은 여걸로 영원히 남게 될지 아니면 실패한 경영자로 기억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주호석 캐나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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