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관/하자센터 부소장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파시즘의 실천이 대중의 일상 속에서, 심지어는 그것에 대항하는 실천 내에서조차 재생산되고 있는 단면을 끄집어낸다. 저항의 언어들과 그 수행 방식 사이의 극적인 대비는 우리 안에서 성찰해야 할 대상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현 정부 들어 ‘개혁’은 한국사회의 화두였다.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로 제기된 ‘개혁’의 문제는 우회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선택을 정당화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IMF에서 벗어났다는 선언과 파티가 있고 난 후 개혁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개혁피로증’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편승하지 않고 몇 년간 진행된 개혁에 대해 따져보는 일이 절실하다.

나는 얼마 전 개혁이라는 단어와 그 실천 사이의 괴리를 절감하는 경험을 했다. 서울시에는 ‘시정개혁단’이라는 조직이 있어 시의 정책에 대한 방향성을 점검한다고 한다.

관료조직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삶의 현장과 밀착될 수 있는 행정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집약된 조직이 바로 시정개혁단일 것이다.

하지만 시정개혁단의 한 구성원이 전화를 걸어 “평가단이 현장에 갈 차량을 대기시키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들었다. 더욱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개혁 안의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을 추진하는 조직의 의식이 이렇다면 그 조직이 개혁을 수행하는 것은 거의 넌센스에 가깝다. 교육 개혁 이후의 경과에서부터 지금 내가 고발하고 있는 시정 개혁에 이르기까지, ‘개혁’이라는 말이 관료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혁이라는 말로 자신

을 권력화하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정책 수행의 언어와 방법들에 대한 성찰이 없는 ‘개혁’은 혐오감의 근원이 될 뿐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은 의미 없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의 역동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진지한 제안을 담고 있어야 하며, 의사소통을 통해 개혁 주체와 개혁 대상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산적 제안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혁은 피해의식만을 생산한다.

더 이상 피해의식의 정치학이 한국 사회에 만연해서는 어떤 변화의 노력도 정당성을 상실할 수 있다. 서로 경계를 넘어 보고 관찰하면서 서로 배우지 않는 식의 실천으로는 적지 않은 고통을 감내한 개혁의 실패를 앞당길 뿐이다.

기존의 기준과 실천에서 거리두기를 하면서 유연하고 생산적인 개혁 주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자신의 관성과 관행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준비는 우리 사회에서 불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개혁을 할 내적 준비가 미달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개혁이라는 말을 떼는 것이 사람들의 허탈함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탈권력, 탈정치의 매력에 이끌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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