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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직은 또한 뒤이어 시인하고야 말았다. 그는 명망있는 서울의

교육자 집안의 딸이요 사회학교수 지망생인 백민홍을 강원도 산골짜

기에 있는 볼품없는 기도원의 밥순이요 고아들의 보모로 들어 앉힐

생각은 미처 하지 않았었음을. 아니, 어쩌면… 나 역시 예쁘고 젊은,

집안 좋고 학벌좋고 직장 좋고 믿음 좋은 신부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뭇 사내들보다 한 술 더 떠서 이 모든 조건들 위에 강원

도 산골에서 푹 썩을 수 있는 희생 정신까지 갖춘 완벽한 여성을 아

내로 맞을 수 있기를 내심 꿈꿔왔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가당

착적인 내 사랑법때문에 나는 방금전 백민홍의 청혼앞에 한 순간 침

묵했던 건 아닐까?

“미…민홍, 민홍의 얘기는 사실 내 가장 아프고 약한 부분을….”

그는 백민홍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 커녕

다만 입으로만 ‘사랑’타령을 해왔는지도 모른다고 그녀에게 털어

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믿어 왔던 백민홍을 향한

그의 감정이 그처럼 허위로 뭉뚱그려져 있음을 자인했음에도 불구하

고, 아니 그가 지닌 사랑의 이중성을 반성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웬일일까? 무엇때문일까, 무엇이 나와 백민홍 사이에 분리대와도

같은 높고 깊은 괴리감의 장벽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녀의 청혼앞에서 한 걸음 주춤 뒤로 물

러서게 했던 것일까? 백민홍은 수미가 아니쟎은가?

어느새 그의 이마와 콧등은 물론 등골에도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

다. 바로 그때였다. 그는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튀어 나오는 신음을

삼킬 셈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훠훠훠! 한 사람도 아닌 서너명의 장정들이 하나 같이 입을 온통

벌린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폭소와 비아냥이 그의 귓청을 쳤다.

이 ×새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육두문자들이 그의 귓전은 물

론 전신에 되살아 난 순간 그는 두눈을 찔끔 감으며 손으로 귀를 막

았다. 욕조하나 가득 차 있는, 토사물과 코피로 싯누렇게 변한 더러

운 물이 마치 홍수뒤끝에 범람한 강물처럼 넓고 깊게 바로 그의 눈

과 코끝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장정의 투박한 손이 그의 뒷목을 왁

살스레 그러쥐자 그는 숨길이 막혀서 밭은 기침을 했다. 또 하나의

장정이 첫번째 장정과 합세해서 그의 뒷목과 머리를 찍어 눌렀다.

그는 신음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강물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의

코와 입과 눈 속으로 오물이 흘러 들어오면서 그의 코와 기도(氣道)

를 막았다. 그는 창자에서 터져나오는 신음마저 토해내지 못하고 그

대로 정신을 잃었다. 뒤이어 그는 만삭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른

그의 복부의 끔찍한 모습에 다시금 혼절했다. 장정들이 구두발로 그

의 복부를 밟아 대었다. 요도(尿道)는 물론 내장의 장기가 터지는 듯

한 격렬한 통증에 그는 휘말려 들었다. 사람 살려요! 그들 장정들은

그를 울러 매었다. 살고 싶으면 끄나풀을 불라고. 그는 턱이 떨리자

어금니를 물었다.

“혀…엉. 어… 어디 아프세요?”

그는 백민홍이 놀라서 화등잔만하게 뜬 눈으로 그를 흔드는 바람에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면서 눈을 떴다.

“아아니! 민홍이, 괜찮아.”

그 역시 당혹스러웠기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랬다. 적어도 수미로부터 도망쳤던 까닭은 아름답고 정결한 여성

에 대한 질긴 동경때문이었다. 하지만 백민홍이라는 그가 아끼는 여

성으로부터 주춤 뒤로 물러서게끔 덜미를 나꿔챈 것은 아전인수격이

고 탐욕적인 그의 사랑의 자세탓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제서야

감을 잡았다. 사람의 진심이나 사람과의 사랑을 향해서 그가 한 발

자욱 내디딜적마다 여지없이 그의 덜미를 후려치는 그 악령의 실체

가 무엇인가를.

삽시간에 내 영혼과 육체로부터 여지없이 생명력을 갈취해버리고

소진시켜 버리는 반(反) 생명력 아니 죽음의 존재를 나는 어떻게 백

민홍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아! 내 힘과 의지만으로는 도

저히 이겨낼 수 없는 그 반생명력의 역습(逆襲)과 그 무서운 위력을

과연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는 간헐적으로

나를 주검의 상태로 몰아가는 그 치명적인 지병(持病)과 아울러 내

영혼에 음습한 사망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죽음의 폭소와 비아냥

의 공격을 나는 과연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병신새끼! 웃기네! 그를 모 기관의 밀실에 가두워 둔 채 그의 생

명력과 자존심을 난도질했던 통치자의 하수인들이 터뜨렸던 그 비웃

음은 시도 때도 없이 귀청을 찢으며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삶으로부

터 멀리 멀리 도망치도록 그를 들쑤시곤 했다. 지금처럼 재작년이었

던가. 그가 지붕밑방 사회학 강의실에서 백민홍과 단둘이 마주쳤을

때에도 그 죽음의 조소는 백민홍을 향해 다가서던 그 순간에도 그를

공격했다. 그 뿐인가. 그가 군복무중에 동료군인들과 축구를 즐겼을

때 그에게 축구공을 앗아갈 셈으로 어금니를 물고 돌진해 들어오던

어느 병사의 무서운 눈매를 목격했을 때에도 그 죽음의 조소는 그의

손과 전신에서 축구공과 함께 투지력 모두를 송두리째 앗아 갔다.

그는 한 병사의 집요한 공차기앞에 여지없이 나가떨어졌다. 무릎과

관절뼈 모두를 부숴뜨린 채. 방금전 백민홍이 그에게 간접적으로 사

랑을 고백하면서 청혼했던 그 순간에도 그는 무서운 정치적인 폭력

이 그의 심신에 낙인을 찍어 놓았던 후유증의 덫에 빠져 들어 갔다.

새꺄. 니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다 한다고? 병신 새끼! 웃기지마!

1980년 득세했던 막강한 군부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을 억압하는 일

에 동원되었을 뿐인. 다만 권력의 또다른 희생자들에 불과한 그들

장정들은 그들이 자행했던 폭력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신군부의 항거자들의 심신을 난도질했다. 그들은 영원히 모르리

라. 그들이 구둣발로 뭉갰던 것은 다만 젊은 저항자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순수하고 여린 영혼이었음을. 그들은 또한 상상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로 학대

받았던 이들은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간주하는, 처절한 자기 비하증

을 앓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중 몇몇은 언젠가는 자신을 아프게 했

던 가해자처럼 타인을 짓밟고 싶어하는 가학증에 떼밀려서 결국은

타인을 폭력하는 가해자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그들 장정들이나 군

부세력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형, 정말 괜찮으세요?”

백민홍이 다시 채근하자 성직은 자신의 세계 속으로 멀리 피해 달

아나는 자폐증에서 간신히 헤어 나왔다. 오히려 허옇게 질려 있는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목격했을 때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

와 콧등에 구르는 식은 땀을 닦았다. 그는 냉수컵을 단숨에 비웠다.

그제서야 그 자신의 생환은 물론이고 그들 두 사람을 위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금 당장 박 선배와

의 약속을 깬 즉시 이곳을 빠져 나가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단 둘만

이 얘기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서 삶에 대한 자신감은 물론

그녀를 향한 진솔한 감정마저 앗아가 버리는 폭력의 후유증에 대해

서 털어 놓으리라. 내가 바로 80년대 초반의 폭력 통치가 낳은 많은

희생자중의 하나라고 밝히겠노라고 작정하고 보니 한결 마음이 가쁜

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홍이, 털어 놓을게 있는데. 모진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던 얘

기….”

“네에?”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잠시 기다려주도록 부탁한 그는 잰 걸음으로

식당안의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별반 친하지도 않았던 후배를 만

나기 위해서 선배가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이른 시각에 집을

나섰을 리가 만무한지라 그는 약속을 미루자고 선배에게 청할 셈이

었다. 그가 공중전화 박스 속으로 들어가려던 찰라였다. 그의 등을

치는 사내가 있었다. 시비를 거는 주정뱅이를 흘겨보던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는 매장(賣場)의 매품처럼 줄지어 서 있다는 신

부감들과 맞선을 볼 셈으로 일시 귀국했다는 박남존 선배였다. 서울

에서 대학입시에 연달아 실패하자 미국에서 학부과정부터 밟았던 장

기간의 체류탓인 듯 선배의 전신에서는 느끼한 버터냄새가 나는듯

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왜, 오랫만에 만난 선배가 귀찮냐? 애인과 데이트라도 하는 중이

니? 하.”

“아…아니 형 반가워요. 어떻든 형에게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는 선배의 출현으로 그의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기자 부아가 치

밀었다.

“염려마. 임마 약속시간까지 얌전한 강아지처럼 저쪽 자리에서 기

다릴게.”

허나 백민홍이 불청객임을 기억해 낸 그는 선배를 그들의 자리로 안

내했다.

“야, 일구월심 너를 만나려고 맞선을 본 아가씨까지 떨치구 왔다

야.”

그는 4년만에 만난 선배의 너스레가 역겨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옆자

를 권하며 민홍에게 양해를 구했다.

“민홍이! 며칠 전에 선배님과 선약이 있었거든.”

“아, 저…미스. 자리를 뜨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전 불청객이

거든요.”

선배는 그러나 어느새 백민홍의 바로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

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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