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각한다]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언니들의 병원놀이’ 기획자
  • 승인 2018.03.06 14:53
  • 수정 2018-03-07 1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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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열린 ‘#미투(MeToo) 필리버스터’ 현장. ⓒ언니들의 병원놀이
지난 2월 24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열린 ‘#미투(MeToo) 필리버스터’ 현장. ⓒ언니들의 병원놀이

한복 차림의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전주 한옥마을의 경기전 앞 광장 한가운데에 마이크가 놓였다. 지난 2월 24일 이곳에서 의사·활동가로 구성된 단체 ‘언니들의 병원놀이’가 주최한 ‘#미투(MeToo) 필리버스터’가 진행됐다. 활동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행사를 알리고, 참여자들을 모았다. 직접 참여할 수 없거나 익명성이 필요한 경우, 동의를 받고 사전에 내용을 받아 정리해 인쇄했다. 이렇게 모인 사례들 중 일부는 전시하고, 다른 참여자들이 대신 번갈아 마이크 앞에서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릴레이처럼 낭독이 이어지는 가운데, 용기를 낸 발언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채팅 앱에서 만난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내가 그런 남자를 따라나선 것이 잘못 같았다. 가족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나에게 실망할까 봐 겁이 났다.”

“엠티에 가면 선배들이 신입생 여자만 한 명씩 따로 불렀다. ‘우리 중 한 명이랑 할 거면 누구랑 할 거냐’ ‘잘생긴 선배 것 빨 수 있냐’ ‘가슴 만져도 되느냐’고 물어봤다. 이런 걸 버티기 힘들어서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5살 때 동네의 남자 중학생들에게 구강성교를 강요당했다. 면도칼을 내 얼굴 앞에 내밀고 협박했다. 같이 당했던 중학생 언니는 그 일 이후 이사를 했다. 나는 어려서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 같다. 그 언니가 지금도 너무 걱정된다.”

“8년째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외모나 행동 하나하나까지, ‘여자는 이래야 해’ ‘여자로 태어났으니 이게 당연해’라는 시선들이 너무 힘들었다. 그것에 나를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떨리는 목소리에 때론 울음이 섞였다. 처음 꺼내보는 고백이라고들 했다. 말을 잇기 위해 긴 침묵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고개를 숙이거나 돌아서지 않았다. 함께 숨죽이던 사람들은 침묵 사이마다 조용히 박수를 보냈다. 발언을 마친 참가자들이 서로를 묵묵히 안아주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서로를 마주 보는 눈빛 사이에 위로와 경의가 와 닿았다.

준비 기간 동안 사례들을 정리하는 내내 잊고 있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다른 여성들의 사례에서 내 경험이 비춰 보였다. ‘나도, 나도 이런 일 있었어’. 우리가 나눈 사례들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이것은 ‘보편적인’ 경험이었다. 단 한 번도 어떤 형태로든 성폭력을 겪지 않은 여성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외쳐야 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라고.

SNS 안에만 있는 존재들, 로그아웃하면 사라지는 존재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 당신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언론에 떠들썩한 일부 사람들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당신의 가족, 친구, 연인이 평생 견디고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외치고 싶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몇몇 유명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가해자였을 수 있다고. 재미있다고 던진 농담, 술자리 문화, 몰카 동영상 공유, 당연하게 여겨왔을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꾼 폭력이었을 수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지난 2월 24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열린 ‘#미투(MeToo) 필리버스터’ 현장에 참여한 시민들이 포스트잇을 통해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했다. ⓒ언니들의 병원놀이
지난 2월 24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열린 ‘#미투(MeToo) 필리버스터’ 현장에 참여한 시민들이 포스트잇을 통해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했다. ⓒ언니들의 병원놀이

행사가 계속된 2시간30분여 동안, 전시된 사례 글들을 보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복을 입은 연인들이 게시글을 보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오랜 시간 곰곰이 사례글 앞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시된 사례글 위에 어느덧 하나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Girls can do anything’, ‘Stop violence against women!’ ‘#MeToo’.

최근 이어지는 미투의 파도에 대해, 한쪽에서는 ‘왜 폭로에 의존하느냐’고 묻고, 한쪽에서는 ‘왜 실명으로 폭로하지 못하느냐’고 조소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헐뜯는다. 그 질문들은, 다 틀렸다. 왜 말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왜 이제야 말할 수 있었는가. 무엇이 지금껏 말할 수 없게 했는가. 그럼에도 왜 지금 수많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수 있는가. 그것에 집중하지 않는 질문은 다 틀렸다.

이것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 누구의 목소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향해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면서도 발언자 모두가 결코 빼놓지 않았던 말. 모든 인터뷰와 사례들 말미에 반드시 붙어있던 말. “저와 같은 일을 당하는 여자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라요”, “피해당한 여성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위로가 되고 싶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사람은 계속 그런 짓을 하고 다닐 것 같았어요”.

자신의 피해 경험을 딛고 일어서서 스스로 기꺼이 촛불이 된 여성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 오히려 다른 여성들을 염려하는 그 말들마다, 나는 미투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슴 깊은 곳에서 자꾸만 울컥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전사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미투라고 새삼스레 이름 붙은 이 촛불이 점차 더 큰 들불로 번져나가야만 하는 이유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언니들의 병원놀이’ 기획자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언니들의 병원놀이’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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