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여배우’

배우 정려원의 목소리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장면

 

배우 정려원이 2017년 12월 31일 2017 KBS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KBS 연기대상 방송화면 캡쳐
배우 정려원이 2017년 12월 31일 2017 KBS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KBS 연기대상 방송화면 캡쳐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로 알려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발언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마녀는 인간 남성을 사랑하게 된 인어공주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대신 목소리를 빼앗는다. 말을 못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냐고 인어공주가 항변하자 마녀는 인어공주를 비웃으며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잘라 말한다. 인어공주가 인간 남성을 사랑하기 위해서 잃어야 했던 것, 그것은 발언권이다. 

‘여배우’라는 특정 직업군과 동화 속 인어공주는 무척이나 닮았다. 여배우는 ‘만인의 연인’이라는 수식어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금기시된다. 여배우가 자칫 목소리를 잘못 냈다가는 대중의 사랑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할인카드’ 논란의 김옥빈이나, 광우병 이슈의 ‘청산가리’ 발언으로 끔찍한 악플 세례를 겪어야 했던 김규리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 연말 시상식 자리에서 한 여배우의 수상소감이 큰 화제가 됐다. KBS 드라마 ‘마녀의 법정’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정려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화기애애한 잔칫상 앞에서 쉽게 꺼내기 어려웠을 무거운 사회적인 메시지를 차분하게 전달했다. “성범죄, 성폭력이라는 주제는 우리 사회에 감기처럼 만연하게 일상처럼 퍼져 있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범죄 피해자 중 유일하게 성범죄 피해자 분들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성적수치심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성범죄에 대한 법이 강화되어서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래서 피해자들도 용기 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정려원이 무대에 오르기 전 상을 받은 배우는 공교롭게도 연기자 지망생에 대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적 있는 박시후였다. 힘든 시기를 벗어나 연기로 보답하겠다던 그는 정려원의 소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뼈 있는 수상소감의 후폭풍은 거셌다. SBS 앵커 김성준은 정려원의 소감을 두고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엉뚱한 인상평을 내놓아 인터넷 공방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군더더기 인사말 빼고 좀 더 완성된 입장을 내놨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성범죄자 처벌 강화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이를 공론장으로 가져온 메신저 정려원을 비판한 이유는 그가 여배우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가 시상식에서 ‘만인의 연인’이 아닌 한 명의 시민으로 서서 발언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014년 배우 한주완은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수상소감으로 현장에서 큰 환호를 받았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에둘러 비판한 한석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절대 참을 이길 수 없다”라는 세월호 참사 추모곡의 가사를 인용한 차인표의 수상소감도 ‘개념 수상소감’으로 박수를 받은 바 있다. 황정민의 그 유명한 ‘밥상 수상소감’에 대해서도 어눌하지만 진심을 담은 발언이 감동적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좋은 메시지지만 기왕이면 좀 더 완성된 입장을 내놓지 그랬냐는 아쉬운 반응을 들은 수상자가 정려원 이외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배우들은 이제 ‘시상식의 꽃’으로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2015년 ‘보이후드’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패트리샤 아퀘트는 “그동안 우리는 모든 미국인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싸워 왔습니다. 이제는 남녀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고, 미국에서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때가 됐습니다”라는 소감으로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메릴 스트립은 지난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뒤 “권력을 가진 공인이 다른 사람의 장애를 조롱하는 것은 모두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라는 소감으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태도를 비판했다. 올해 골든글로브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여성들이 용기를 내 남성들의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혀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남성들의 시간은 끝났고 이제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목소리다. 마녀는 인어공주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아 그와 왕자 사이를 방해했다. 그에게 목소리가 있었다면 동화의 결말은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2016년 SNS에서 시작된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이나 2017년 할리우드에서 전개된 #Me Too 운동은 힘이 붙은 목소리가 어떻게 함성이 되어 가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이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를 고심하며 신중하게 발언을 이어가던 정려원의 긴장된 목소리는 2018년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첫 페이지로 기억될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