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털 깎는 걸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재미있는 관찰 하나. 남성들 중에 소매가 없는 여름티를 입은 이는 많이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반면 여성들은 팔이 없는 웃옷을 많이 입는다. 나시라고 불렀던가? 옷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 이유도 모르겠고 그 심리도 모르겠지만, ‘나’는 민소매옷을 입을 수 없을 거란 건 분명히 알고 있다. ‘왜? 그냥 입으면 입는 거지…’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 사정은 이러하다. 긴말 할 거 없이 나는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기 때문이다.

허망한가? 아니다, 이럴 수도 있겠군. 우리 나라의 모든 여자들은 겨드랑이에 털이 나지 않는데 엄마를 비롯한 우리 집 여자들만 겨드랑이에 털이 나는 별난 존재였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러한 나의 변이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숨기기 위해서 민소매옷을 입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엄마나 동생이나 마찬가지다. 아, 우리 엄마는 왜 이런 나를 낳아놓고도 겨드랑이털 깎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더란 말이냐, 적어도 어디 가서 털 깎는 기계를 사야 한다는 것쯤은 가르쳐줘야 하지 않았나…나는 이렇게 지금까지 엄마를 원망했을 법도 하다.

거대한 발견 두 가지 중 첫째. 얼마 전인지는 모르겠다. TV뉴스에서 줄리아로버츠의 얼굴을 봤다. 왜 뉴스에 그녀가 나왔을까. 그건 바로 그녀가 ‘털을 깎지도 않은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 나만 겨드랑이에 털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발견 두 번째, 여성영화제때 상영했던 <섹시한 느낌>을 기억하는가? 여성영화제 데일리에서 컬러로 인쇄된 주인공 비키의 사진에는 분명히 그녀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거무스름한 뭔가가 있었다. 아니, 이거 이상한데, 겨드랑이 털 있는 여자가 떳떳이 대낮의 태양 아래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러한 충격들이 점점 여름철만 되면 털에 대한 스트레스와 열등감에 젖어있던 나의 태도에 변화를 일게 한다. 우리 나라 여자들 겨드랑이에 털이 없는 거, 이게 과연 정상일까.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의 겨드랑이에서 털을 깎아내고 있는 것이며 그 이유는 도대체 뭐지?

나는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누드화에서 여성의 성기에 털을 그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는가? 털이란 것은 힘과 성욕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여성이 힘을 가진다든지 성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분명 오랜 세월동안 금기시돼왔다. 현대도 마찬가지다. 남자 배우가 민소매옷을 입고 촬영한 사진에서 그가 갖고 있는 겨드랑이 털은 그를 뭔가 쿨하고 강인하며 야성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처럼 만들어 주는 아이템이다.(물론 때에 따라서, 그리고 나에겐 느끼함을 주지만 일반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은 모두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민소매옷을 입는다는 것부터가 그러한 의도를 강하게 품고 있는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반면, 여자배우가 민소매옷을 입고 촬영을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팔을 올리거나 해서 가슴을 강조하는 ‘섹시한’ 사진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며 당연 겨드랑이에 털은 없다. 아, 너무 거창할 것까지도 없겠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요즘 같으면 거리에 나가서 치이는 여자가 겨드랑이 털 없는 나시티 입은 여자들일 테니 말이다. 그녀들은 민소매옷을 입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겨드랑이 털을 깎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민소매옷을 입지 않는다 해도 겨드랑이 털이라는 것은 불결하고 냄새나는 것이며 반드시 깎아야 할 여성의 조건이며 예의가 될른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겨드랑이 털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당당히 민소매옷을 입은 여자들을 볼 때마다 또 한번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방대하고 은밀한 가부장적인 통제권력의 발현을 본다. 그리고 자신 있게 겨드랑이 털을 날리며 민소매옷을 입지 못하는 나의 소심함에 분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 한 여자가 이렇게 외쳤다. “털이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래, 털이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리고 이제 우리 털 깎는 걸 그만해도 될 때가 온 건 아닐까. 언젠가 당신이 겨드랑이 털의 자람에 대해 끊임없이 점검하지 않아도 되는 모습을 보고싶다.

전하영/고려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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