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으로 가는 길목에 선 남성들

@1.jpg

▶사진은 제3회 안티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한 한 남성의 퍼포먼스 <사진제공 ·<이프>>

요즘 남학생들은 고민이 많아졌다.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들은 고향친구와 군대 같은 집단적 정체성만 가져왔지만 이젠 개별적인 자아를 갖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여성학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 고민하는 남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것.

“이젠 개별적 자아 갖고 싶다”

여성학과 자신의 삶 연계 노력

김 교수는 “예전엔 여성문제의 원인을 ‘여성이 의식화되지 않은 탓’으로 돌리며 비웃던 남학생들 사이에서 이젠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현재 서강대에서 남성문화이론 수업을 듣고 있는 김지택(경영·4)씨는 6∼7명의 수강생들과 함께 ‘군대와 군사문화’에 대해 연구·발표를 준비해왔다. 김씨는 “남자들은 군대라는 인큐베이터를 통해 남성성의 틀이 잡혀 나온다”면서 집단주의와 끼리문화, 권위주의, 그리고 심각한 성의 상품화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이안혜성 서울시립대 여성학 강사는 “군대내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경험, 그리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남학생들도 생겨나고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실천적 학문인 여성학을 배우는 데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강조한다.

성관계나 피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시인하고 배우려 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달라진 모습 중 하나다.

성문란을 초래한다며 비난하거나 콘돔 사용법을 배우면서 키득키득 웃던 학생들이 이제 사뭇 진지해졌다.

기존 남녀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패러디한 도서 <이갈리아의 딸들>에 대한 서평을 보면 최근 남학생들의 의식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단지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 위에 군림하려 들거나 자기 할 일을 게을리 한다면 스스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경고가 와 닿았다” “누가 강하냐, 약하냐에 대한 편견을 깨야겠다” 등, 현 사회를 반추해 보기보다는 남성이 굴욕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게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사회냐”며 화부터 냈던 수년 전과는 다른 반응들이다.

성평등 의식 머리에만 새길 뿐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진 않아

그러나 이러한 조짐을 쉽게 일반화시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여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남학생들이 의식적으로는 성차별에 대해 많이 알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남성들은 이제 가사노동과 육아가 여성의 전유물이라거나 생계부양을 남성이 담당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진도’는 결코 만족할 수준이 아니다.

군 제대 후 현대사회와 여성이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김영환(서강대 사회학과 석사과정)씨는 “남자들은 주어진 대로 살면 편리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냥 눌러앉기 십상”이라고 지적한다. 평등남성모임의 최낙성(37)씨의 표현에 따르면 “부자보고 세금 많이 내라면 펄펄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김영환씨는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독립해 나와 요리하고 빨래하는 것도,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성희롱을 일삼는 고향친구들과 싸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기존의 권위적인 남성상을 거부하고 여성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가려는 남성들을 ‘마마보이’라거나 ‘남자답지 못하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시선 역시 큰 장애물이다.

연세대 총여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서최용완(21)씨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연대하는 것을 남성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냥 남성적이지 않은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변해야 남성도 변한다.”

가정 내 평등을 이루려는 남편들,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는 남학생들,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남성들… 이들 대부분의 특징은 누이나 여자친구, 여성동료들로부터 새로운 여성상을 발견하고 이들로부터, 혹은 여성학이나 여성운동을 통해 남녀평등의식을 고무 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구성애 씨의 아우성 강좌를 듣고 대학에서 학내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을 본 남학생들은 성문화에 대해 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여성들의 새로운 성역할 모델

남성들 변화시키는데 큰 힘

여성학 연계과정으로 저학년 때부터 관련 과목을 수강해 온 한 학생은 “‘다방 개 3년이면 판 돌린다’고 자꾸 듣고 접하다 보니 깨일 수밖에 없더라”고 말한다. 예전엔 입 벌리고 구경하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이젠 보기 싫어졌다는 것.

무엇보다 여성들이 새로운 성역할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남성들에겐 큰 자극이 된다. 서구에서도 80년대에 한창 새로운 남성상을 추구하는 ‘뉴맨 신드롬’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남성들의 여성들과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희생적인 어머니와 누이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이 아닌,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들을 접하면서 남성들도 새로운 남성 모델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아직 미약하긴 하지만 남성들은 이제 견고한 가부장제의 틀을 벗어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성평등을 위해 남성이 자발적으로 나설 때 사회는 더 빨리, 더 쉽게 변화할 수 있다.

새로운 남성상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기존의 가치관을 깨고자 하는 남성들을 독려해주고 손을 내미는 역할은 가부장제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몫이다.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관련기사>

▶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 여성주의에서 ‘길’을 찾는다

▶ [인터뷰]‘남성학’ 연구하는 정유성 교수

▶ ‘남성 길찾기’ 필독서

▶ 성평등 위해 무엇이든 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